목차
Ⅰ. 머리말
Ⅱ. 순자의 사상에 관한 고찰
1. 순자 사상의 특징
1) 천 론
2) 성악설
3) 예(禮)론
4) 순자의 논리학
2 . 중국사상 의 흐름
Ⅲ. 맺음말
Ⅱ. 순자의 사상에 관한 고찰
1. 순자 사상의 특징
1) 천 론
2) 성악설
3) 예(禮)론
4) 순자의 논리학
2 . 중국사상 의 흐름
Ⅲ. 맺음말
본문내용
몸을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고 서로 이익을 도모한다는 사상을 내세워, 유교의 인이 가족애(家族愛)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임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공자 사상의 주관적 측면을 발전시킨 맹자(孟子)는 묵가(墨家)와 대항하기 위해 인과 함께 의(義)의 덕을 강조하여 사랑의 차이 등을 설명하고, 인간 본성을 선(善)한 것[性善說]이라 하여 윤리의 내면적 주체성을 강조하였으며, 또한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을 펴 유교의 정비를 이루었다. 같은 무렵 이러한 현실적 입장에서, 인간만을 관찰하는 입장을 비판하면서 현상의 안쪽을 주시(注視)하고 또한 자연 속에 있는 인간을 보려는,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이 나타났다. 세속을 초월한 입장에서 현실을 고쳐봄으로써 정신의 평안과 사태의 처리를 도모하려는 것으로, 그 중심은 도의 자연성과 통일성의 강조였다. 유가(儒家)의 순자(荀子)는 이에 반발함으로써 같은 유가의 맹자와 대립되는 입장에 섰다. 여기서는 선이란 인간의 작위(作爲)이다.
내면의 자연성을 좇는 것이 아니라 성인(聖人)이 제정한 외적 ?객관적인 예제(禮制)를 좇아야 한다 하고, 인간본성은 악(惡)이라 하였다[性惡說]. 그러면서도 인간의 지능을 속박하는 천은 부정하였다. 이 객관적인 사회규범으로서의 예(禮)의 강조는 앞으로 올 통일제국(統一帝國)의 이론으로서 준비되었으며, 같은 시대의 한비(韓非)의 법가사상(法家思想)은 보다 직접적으로 그 목적과 합치하였다. 그것은 엄격한 상벌(賞罰)에 의해 객관적 ?형식적인 법의 통계를 유지하려는 것으로, 강한 인간불신(人間不信)을 바탕으로 한 지배의 철학이었다. 筍子의 예사상과 한비의 법사상으로 통일제국의 이론적 준비는 끝났다.
Ⅲ. 맺음말
공자(孔子) 이후 맹자(孟子)에 의하여 정비된 유교는 내면적 ·주관적인 입장만이 강화되었으므로 순자는 이에 반대하여 공자의 예(禮)의 사상을 내세워,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객관적 입장에서 유교를 재정비하였다. 먼저 공자나 맹자에서 도덕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생각되어 온 천(天)의 권위를 부정하고 하늘은 인간의 도덕적 활동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연의 천공(天空)에 불과한 것이라 하여 ?하늘과 사람과의 분리?를 선언하였다. 그것은 자연으로부터의 인간의 독립선언으로서는 귀중한 뜻을 지녔으나 유교의 전체적 역사에서 볼 때는 이단적(異端的)이었다. 독립된 인간의 존엄성은 예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으로, 예는 순자의 경우 성인(聖人)이 정한 사회규범(社會規範)으로 뚜렷한 객관적 형식이었으며, 그에 따르는 것만이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질서와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라 하였고, 따라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가치도 발휘된다고 하였다.
순자가 살던 시대는 주나라가 완전히 몰락하던 전국 시대 말기였습니다. 공자 때에도 이미 겸병 전쟁의 주체가 점점 아래 계층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나타냈지만, 전국 시대에 이르면 구 귀족만이 아니라 새로운 지주 계층들까지 등장하면서 혼란이 더 심해집니다. 그리고 이같은 상황은 기존 통치 세력과 신흥 지주 계층의 대립으로 압축됩니다. 구 귀족은 봉건 통치의 부활을 꿈꾸면서 예치(禮治)를 내세웠고, 신흥 지주 계층은 개혁을 표방하고 법치(法治)를 주장했습니다.
순자는 이런 상황에서 예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법에 의한 통치 이론을 완성시킨 제자들, 한비자와 이사를 통해 열매맺게 됩니다. 역사의 발전이 가져온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순자의 사상은 위에서 본 것 같은 사회적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순자 사상의 특징은 철저하게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을 악하다고 했지만, 그 악한 본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간 자신의 의지적인 노력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구체적인 제도로 예제의 부활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현실의 임금들이 당시에 맞는 예의 제도를 만들어서 피치자 모두를 교화시켜 가기를 바랐습니다.
순자는 자신의 철학에 여러 가지 가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는 이유 때문에 동양의 프로메테우스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카우카수스 절벽에 매달려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던 프로메테우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을까? 아니면 인류를 위한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을까?
순자는 자기보다 먼저 유가를 높였던 맹자를 혹평하였습니다. 맹자는 글과 말만 뛰어났을 뿐 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덕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유가의 몰락을 재촉했다는 것입니다. 순자는 유가가 몰락한 책임을 맹자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순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인간의 어두운 면을 집어내고 그 현실적인 처방을 제시하였습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 들어 있던 불행들처럼. 그러나 그 제일 밑에 희망을 남겨 놓았습니다. 착한 일을 행하면서 본성을 거스를 수 있는 인위적인 의지가 그 희망입니다.
인간의 수양(修養)은 맹자와 같이 인간의 심성(心性)을 선(善)으로 보아 그 선을 발전시키는 방향이 아니며 예의 형식에 의하여 외부로부터 후천적으로 쌓아 올리는 것이라 하였다. 즉,'인성(人性)은 악(惡)'이며 '날 때부터 이(利)를 좋아하고' '질투하고 증오하는' 것이므로 그대로 방치하면 쟁탈(爭奪)과 살육이 발생하기 때문에 악이라는 본성을 교정(矯正)하는?사법(師法)의 가르침과 예의의 길?인 위(僞:人爲)에 의해서만 치세(治世)를 실현할 수 있다 하여, 여기에서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반대하는 성악설(性惡說)이 태어났다. 송대(宋代) 이후 이 성악설과 천(天) ·인(人) 분리설로 인하여 이단시되어 왔으나 그 논리학이나 인식론을 포함한 사상의 과학적 성격은 한대(漢代) 유교에 크게 기여한 역사적 의의와 함께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 《참고문헌》
1. 김교빈.이효걸.홍원식[중국의 종교와 사상],, 2003
2. 김곡치 외, [중국문화개론], 조성을 옮김, 이론과 실천,1986
3. 이운구, [중국의 비판사상], 여강출판사, 1987
4. 노사광, [ 중국철학사 고대편], 정인재 옮김, 탐구당, 1991
공자 사상의 주관적 측면을 발전시킨 맹자(孟子)는 묵가(墨家)와 대항하기 위해 인과 함께 의(義)의 덕을 강조하여 사랑의 차이 등을 설명하고, 인간 본성을 선(善)한 것[性善說]이라 하여 윤리의 내면적 주체성을 강조하였으며, 또한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을 펴 유교의 정비를 이루었다. 같은 무렵 이러한 현실적 입장에서, 인간만을 관찰하는 입장을 비판하면서 현상의 안쪽을 주시(注視)하고 또한 자연 속에 있는 인간을 보려는,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이 나타났다. 세속을 초월한 입장에서 현실을 고쳐봄으로써 정신의 평안과 사태의 처리를 도모하려는 것으로, 그 중심은 도의 자연성과 통일성의 강조였다. 유가(儒家)의 순자(荀子)는 이에 반발함으로써 같은 유가의 맹자와 대립되는 입장에 섰다. 여기서는 선이란 인간의 작위(作爲)이다.
내면의 자연성을 좇는 것이 아니라 성인(聖人)이 제정한 외적 ?객관적인 예제(禮制)를 좇아야 한다 하고, 인간본성은 악(惡)이라 하였다[性惡說]. 그러면서도 인간의 지능을 속박하는 천은 부정하였다. 이 객관적인 사회규범으로서의 예(禮)의 강조는 앞으로 올 통일제국(統一帝國)의 이론으로서 준비되었으며, 같은 시대의 한비(韓非)의 법가사상(法家思想)은 보다 직접적으로 그 목적과 합치하였다. 그것은 엄격한 상벌(賞罰)에 의해 객관적 ?형식적인 법의 통계를 유지하려는 것으로, 강한 인간불신(人間不信)을 바탕으로 한 지배의 철학이었다. 筍子의 예사상과 한비의 법사상으로 통일제국의 이론적 준비는 끝났다.
Ⅲ. 맺음말
공자(孔子) 이후 맹자(孟子)에 의하여 정비된 유교는 내면적 ·주관적인 입장만이 강화되었으므로 순자는 이에 반대하여 공자의 예(禮)의 사상을 내세워,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객관적 입장에서 유교를 재정비하였다. 먼저 공자나 맹자에서 도덕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생각되어 온 천(天)의 권위를 부정하고 하늘은 인간의 도덕적 활동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연의 천공(天空)에 불과한 것이라 하여 ?하늘과 사람과의 분리?를 선언하였다. 그것은 자연으로부터의 인간의 독립선언으로서는 귀중한 뜻을 지녔으나 유교의 전체적 역사에서 볼 때는 이단적(異端的)이었다. 독립된 인간의 존엄성은 예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으로, 예는 순자의 경우 성인(聖人)이 정한 사회규범(社會規範)으로 뚜렷한 객관적 형식이었으며, 그에 따르는 것만이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질서와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라 하였고, 따라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가치도 발휘된다고 하였다.
순자가 살던 시대는 주나라가 완전히 몰락하던 전국 시대 말기였습니다. 공자 때에도 이미 겸병 전쟁의 주체가 점점 아래 계층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나타냈지만, 전국 시대에 이르면 구 귀족만이 아니라 새로운 지주 계층들까지 등장하면서 혼란이 더 심해집니다. 그리고 이같은 상황은 기존 통치 세력과 신흥 지주 계층의 대립으로 압축됩니다. 구 귀족은 봉건 통치의 부활을 꿈꾸면서 예치(禮治)를 내세웠고, 신흥 지주 계층은 개혁을 표방하고 법치(法治)를 주장했습니다.
순자는 이런 상황에서 예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법에 의한 통치 이론을 완성시킨 제자들, 한비자와 이사를 통해 열매맺게 됩니다. 역사의 발전이 가져온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순자의 사상은 위에서 본 것 같은 사회적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순자 사상의 특징은 철저하게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을 악하다고 했지만, 그 악한 본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간 자신의 의지적인 노력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구체적인 제도로 예제의 부활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현실의 임금들이 당시에 맞는 예의 제도를 만들어서 피치자 모두를 교화시켜 가기를 바랐습니다.
순자는 자신의 철학에 여러 가지 가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는 이유 때문에 동양의 프로메테우스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카우카수스 절벽에 매달려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던 프로메테우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을까? 아니면 인류를 위한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을까?
순자는 자기보다 먼저 유가를 높였던 맹자를 혹평하였습니다. 맹자는 글과 말만 뛰어났을 뿐 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덕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유가의 몰락을 재촉했다는 것입니다. 순자는 유가가 몰락한 책임을 맹자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순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인간의 어두운 면을 집어내고 그 현실적인 처방을 제시하였습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 들어 있던 불행들처럼. 그러나 그 제일 밑에 희망을 남겨 놓았습니다. 착한 일을 행하면서 본성을 거스를 수 있는 인위적인 의지가 그 희망입니다.
인간의 수양(修養)은 맹자와 같이 인간의 심성(心性)을 선(善)으로 보아 그 선을 발전시키는 방향이 아니며 예의 형식에 의하여 외부로부터 후천적으로 쌓아 올리는 것이라 하였다. 즉,'인성(人性)은 악(惡)'이며 '날 때부터 이(利)를 좋아하고' '질투하고 증오하는' 것이므로 그대로 방치하면 쟁탈(爭奪)과 살육이 발생하기 때문에 악이라는 본성을 교정(矯正)하는?사법(師法)의 가르침과 예의의 길?인 위(僞:人爲)에 의해서만 치세(治世)를 실현할 수 있다 하여, 여기에서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반대하는 성악설(性惡說)이 태어났다. 송대(宋代) 이후 이 성악설과 천(天) ·인(人) 분리설로 인하여 이단시되어 왔으나 그 논리학이나 인식론을 포함한 사상의 과학적 성격은 한대(漢代) 유교에 크게 기여한 역사적 의의와 함께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 《참고문헌》
1. 김교빈.이효걸.홍원식[중국의 종교와 사상],, 2003
2. 김곡치 외, [중국문화개론], 조성을 옮김, 이론과 실천,1986
3. 이운구, [중국의 비판사상], 여강출판사, 1987
4. 노사광, [ 중국철학사 고대편], 정인재 옮김, 탐구당,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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