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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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2-1. 일본에서의 유학시절
2-2. 조선으로의 귀국
2-3 사상적 언덕, 진학문과 염창섭
2-4. 전쟁 체험과 해군 생활

본문내용

91), p.24
「조선문학 재건에 대한 제의」(『백민』14호, 1948. 5)는 그의 중도적 입장을 문학론으로 구체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재건의 조건으로 첫째, 일본의 잔재를 청산할 것, 둘째, 교육과 문화 발전에 새로운 시각, 새로운 결의가 전제될 것, 셋째, 봉건 잔재의 탈피, 넷째, 좌우익론의 상대적 역할의 중요성 강조 등을 들고 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바, 그남의 문학론은 좌우익 문학론을 절충하면서 중도적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결론
소설분석이나 문학연구가 아닌 생애에 무슨 결론이 따로 있을 수 있겠는가만 자료를 찾고 글을 읽는 내내 염상섭 역시 친일에의 흔적이 없다고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났다. 이광수나 김동인처럼 만주에 가서 "북지황국위문 작가단"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뿐이지 일제 시대 그남의 형은 일본의 군인이었고, 자신은 또한 조선민중들이 탄압 받고 억압받고 이유 없이 학살될 적에 일본 최고의 명문 학교에서 편안히 유학생활을 마치지 않았는가.
소설 속 등장 인물의 이름을 고르기 위해 동네 문패를 하나씩 살피면서 그 이름의 항렬을 따져 볼 정도로 꼼꼼히 작업을 하고, 서라벌예대의 학장 시절에는 강의 한 달만에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며 돌연 강의를 그만 두기도 하는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인 횡보는 술을 지극히도 사랑해 죽는 순간까지 부인이 숟가락으로 떠주는 정종을 마셨다는 일화가 있다. 횡보는 20년대의 다른 사실주의적 경향의 작가들과는 다른 사실주의를 고수하기도 하였다.
우선 풍부한 어휘를 구사한 작가로, 서울 중류 계층 또는 서민층의 용어를 적절히 사용했다. 그 자신이 서울 중류 계층 출신인데다, 그남이 그리는 인물들이 거의 서울 중류층 서민들이었기 때문에, 그남은 서울말 중에서도 순 중류층의 말을 풍성하고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광복 후에도 끊임없는 창작 활동을 하나 폭음과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며, 1962년 3·1문화상을 수상하고 대한민국 문화훈장(대통령장) 서훈(敍勳) 등의 영예를 받으나 「사상계」에 '횡보 문단회상기'를 연재하다 중단, 1963년 사망하고 사후인 1971년 문화훈장 은관 등을 받았다.
<참고 문헌>
김윤식, 『염상섭 연구』, 1987, 서울대학교출판부
김종균, 『염상섭 소설연구』, 1999, 국학자료원
박종홍 외, 『염상섭 문학의 재조명』, 1998, 새미
이용남 외, 『한국현대작가론』, 1997, 민지사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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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4.07.17
  • 저작시기2004.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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