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붕당정치
1. 붕당정치의 발생배경
2. 붕당정치의 개념
3. 붕당정치의 전개과정
4. 붕당정치의 결과와 영향
탕평
1.탕평의 개념
2. 탕평의 대두
3. 영조의 탕평책
4.정조의 탕평책
1. 붕당정치의 발생배경
2. 붕당정치의 개념
3. 붕당정치의 전개과정
4. 붕당정치의 결과와 영향
탕평
1.탕평의 개념
2. 탕평의 대두
3. 영조의 탕평책
4.정조의 탕평책
본문내용
중재되어야 하였다. 17세기 초에 서인과 남인이 공존 관계를 이룬 것은 전자의 경우라 하겠다. 그러나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오히려 후자의 방안이 요청되었다. 따라서, 탕평론은 국왕에 의해 주도되었다.
탕평론이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숙종에 의해서였다. 이 때에는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고 있었다. 노론이 보수적이라면 소론은 진보적이었다. 붕당 사이의 대립으로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숙종은 그 해결책으로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즉, 정치적 갈들은 자연히 해소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시도한 탕평책은 명목상의 탕평론에 지나지 않아 균형의 원리가 지켜지지않았다. 예컨대, 공평을 내세운 그 자신이 인사 정책에서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에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의 조처가 계속된 것은 그의 탕평론이 지닌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더구나 숙종 말년부터는 외척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노론 중심으로 일당 전제화가 추진되면서부터는 탕평론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3. 영조의 탕평책
영조가 초기에 시도한 탕평책도 숙종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탕평의 교서를 발표하여 정국의 혼
란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영조 스스로가 소
론을 내몰고 노론을 중용하다가, 곧이어 노론을 내몰고 소론을
기용하는 등 편당적인 조처를 취해 정국의 불안만을 조성하
였다. 붕당의 세력이 비대해진 정국에서 기반이 약한 왕권으로
정국의 수습을 모색하기에는 역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탕평책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게 된 것은 왕권이 안정되면서부터였다. 영조는 붕당 사이의 균형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힘은 강력한 왕권에 있다고 보았다. 이에 영조는 노론과 소론을 조정하면서 일련의 군제 개혁과 경제 개혁을 단행하여 왕권의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영조는 그를 지지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이른바 탕평파를 육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정국을 주도하게 하였다.
이로써, 치열하던 정쟁은 어느 정도 억제되었다. 정국이 안정된 가운데 균역법이 시행되어 군역의 폐단이 다소 시정되었다. 그리고 신문고 제도가 부활되었으며, 동국문헌비고, 속오례의, 속대전, 무원록이 편찬되는 등 문물이 재정비되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이 붕당 정치의 폐단은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다. 이후 탕평의 원리에 의해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였으나, 소론 강경파에 의해 변란이 자주 일어나면서 소론의 정치적 약화되고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사도 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그 후에는 거의 절대적으로 노론이 우세하였다.
4. 정조의 탕평책
노론은 사도 세자 사건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나뉘었다. 정조는 벽파
의 압력 속에서 세손 때부터 그 지위가 불안하였는데, 즉위 후 벽파를 물
리치고 시파를 관직에 고루 기용하면서 탕평책을 내세워 왕권의 강화를
시도하였다.
정조는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규정각을 두어 국왕 직속의 학술 및 정책 연구 기관으로 육성하였다. 규장각은 본래 역대 국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곳이었으나, 실제로는 진보적 학자들은 모아 붕당이 비대화를 막는 등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박제가, 유득공, 정약용 등이 정치에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정조는 문물의 정비에도 힘써 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등을 편찬하였다. 문물을 정비하면서 절대 왕정을 과시한 정조였지만, 그도 붕당 사이의 융화나 붕당 자체의 해체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탕평론이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숙종에 의해서였다. 이 때에는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고 있었다. 노론이 보수적이라면 소론은 진보적이었다. 붕당 사이의 대립으로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숙종은 그 해결책으로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즉, 정치적 갈들은 자연히 해소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시도한 탕평책은 명목상의 탕평론에 지나지 않아 균형의 원리가 지켜지지않았다. 예컨대, 공평을 내세운 그 자신이 인사 정책에서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에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의 조처가 계속된 것은 그의 탕평론이 지닌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더구나 숙종 말년부터는 외척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노론 중심으로 일당 전제화가 추진되면서부터는 탕평론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3. 영조의 탕평책
영조가 초기에 시도한 탕평책도 숙종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탕평의 교서를 발표하여 정국의 혼
란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영조 스스로가 소
론을 내몰고 노론을 중용하다가, 곧이어 노론을 내몰고 소론을
기용하는 등 편당적인 조처를 취해 정국의 불안만을 조성하
였다. 붕당의 세력이 비대해진 정국에서 기반이 약한 왕권으로
정국의 수습을 모색하기에는 역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탕평책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게 된 것은 왕권이 안정되면서부터였다. 영조는 붕당 사이의 균형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힘은 강력한 왕권에 있다고 보았다. 이에 영조는 노론과 소론을 조정하면서 일련의 군제 개혁과 경제 개혁을 단행하여 왕권의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영조는 그를 지지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이른바 탕평파를 육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정국을 주도하게 하였다.
이로써, 치열하던 정쟁은 어느 정도 억제되었다. 정국이 안정된 가운데 균역법이 시행되어 군역의 폐단이 다소 시정되었다. 그리고 신문고 제도가 부활되었으며, 동국문헌비고, 속오례의, 속대전, 무원록이 편찬되는 등 문물이 재정비되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이 붕당 정치의 폐단은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다. 이후 탕평의 원리에 의해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였으나, 소론 강경파에 의해 변란이 자주 일어나면서 소론의 정치적 약화되고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사도 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그 후에는 거의 절대적으로 노론이 우세하였다.
4. 정조의 탕평책
노론은 사도 세자 사건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나뉘었다. 정조는 벽파
의 압력 속에서 세손 때부터 그 지위가 불안하였는데, 즉위 후 벽파를 물
리치고 시파를 관직에 고루 기용하면서 탕평책을 내세워 왕권의 강화를
시도하였다.
정조는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규정각을 두어 국왕 직속의 학술 및 정책 연구 기관으로 육성하였다. 규장각은 본래 역대 국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곳이었으나, 실제로는 진보적 학자들은 모아 붕당이 비대화를 막는 등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박제가, 유득공, 정약용 등이 정치에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정조는 문물의 정비에도 힘써 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등을 편찬하였다. 문물을 정비하면서 절대 왕정을 과시한 정조였지만, 그도 붕당 사이의 융화나 붕당 자체의 해체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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