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 론
2. 인간과 신의 죽음
3. 인간과 형이상학적 철학
4. 허무주의와 초인
5. 결론
2. 인간과 신의 죽음
3. 인간과 형이상학적 철학
4. 허무주의와 초인
5. 결론
본문내용
수적 삶의 본능으로 복귀이고, 형이상학적 진리나 종교적 진리 그리고 선을 추구하는 것은 존재의 나약함, 의무에 사로잡힘, 그리고 피안의 세계에 대한 동경의 허구적 틀을 부수고 그런 것들의 가치를 무가치로 받아들이고 반항적 힘들을 표출함으로 초극하는 것이다. 결국 니체의 초인이란 삶의 본능의 근원적 힘의 의지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 모든 무가치를 통하여 가치변환을 추구하는 과도한 쾌락과 정열만이 끊임없이 긍정을 허무로 대함으로 긍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초극하는 초인이 되는 것이라면, 초극을 이끌어 가는 인식의 주체는 없는 것인가? 긍정을 비판하는 정신은 대지에서 오는 것일까? 대지 안에서 스스로 이루어 놓은 긍정을 스스로 부정할 수 있는가? 인식의 출현이 육체적 본능의 퇴폐, 데카당스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결국 진화하는 초인은 야수적 본성은 인식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 이성이 없는 광기가 창출하는 예술은 어떤 것이며, 그 초인은 어떤 존재인가?
니체는 존재자 자체를 가치로 해석하였다. 결국 심미적 상태에서 지니는 가치는 존재자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이다. 니체에게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변환되는 가치에 있는 것이다. 원숭이로부터 인간 그리고 초인으로 가는 줄타기를 하는 무엇으로서의 가치이다. 결국 심리적 형태의 니힐리즘은 현대적 형이상학이라고 하이데거는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는 권력에의 의지이며--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너희 자신도 또한 권력에의 의지이며--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심리학은 권력에의 의지가 갖는 제(諸)형태와 제(諸)단계들에 대한 설이다. 이미 데카르트의 인식은 심리학의 일부였다. 단지 심리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하이데거는 지적하고 있다.
) 하이데거, 「니체와 니힐리즘」, 106-7.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자신이 새로운 신을 가르치려고 하였고, 실로 자신이 신적 존재가 되려고 하였다. 예수를 죽음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신의 탄생을 짜라투스트라를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짜라투스트라는 신의 죽음을 말하고 자신을 초극하는 자로서 신적 가치의 존재이다. 즉 끊임없이 자신을 초극하여 다음 단계의 목적에 이르는 힘, 힘에의 의지는 니체에게 있어서 신(神)인 것이다. 이 디오니소스적 신은 허무주의를 통하여 반항적 힘을 통하여 자신을 초극하는 초인인 것이다. 이러한 신은 강해야 하며 자신을 초극해야하기에 늘 긍정에만 의지하는 나약한 인간을 보호하거나 병약한 자들을 남겨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 진화의 과정을 퇴화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도덕을 폐기하고 성실하게 살아감으로서 도덕을 극복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가 도덕을 폐기하고 용기를 가지고 투쟁하고 야수성을 드러낼 때에 인간은 점점 더 강해지고 더 드높은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 광기에 차고 무질서하며 정신의 귀중한 소산을 상실하는 것이다. 자신을 이끌어가던 양심의 도덕을 버림으로 짐승이 되는 것이다. 니체는 결국 양심의 가책에 대하여 "양심을 깨문다는 것은 개가 돌을 깨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설명하였다.
) Nietzsche,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457.
니체가 순수 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말은 순수한 정신은 대상이 없이 홀로 파악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으면서 대상을 파악하는 힘이라면 주체인 것이다. 주체는 대상을 파악하고 인식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순히 변천하는 과정의 가치가 아니라 존재이며 목적이다. 타자를 대상화하는 지력(知力)은 주체의 의식이다. 이것은 그 기원이 물질 또는 대지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精神)의 소산인 것이다.
그는 형이상학적 구조의 구성체인 개념의 세계를 배격하였으나 개념의 세계는 역동적 삶의 세계에 대한 표현이 지니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경험과 함께 혹은 인식과 함께 연동하여 의미를 전달한다. 개념은 허구의 틀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언어가 편견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읽고 해석하는 해석자의 경험이 의미생성에 역동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모든 인식구조가 그렇다. 인식구조는 인식자의 경험과 더불어 이해된다. 허구적 틀이 틀로서만 이해된다면, 인식구조의 형태가 그대로 전달되지 않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이 역동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진행과정에서 생겨난 정신이라면 그 정신은 야수성에 젖어 있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심미적 정신은 보이지 않는 생각의 공간에 정형의 틀 또는 역동적 패러다임을 구성하고 나아갈 정향성을 설정한다. 그 정향성의 목적지에 신의 의지가 있는 것이다. 그 근원에 신의 손길이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 신의 참여가 있는 것이다. 신에 대한 증명이 없이 왜 필자는 신의 손길(창조), 참여(사역), 의지(구속)가 있다고 말하는가? 신(神)은 내 삶의 기원이기에, 인간은 신을 느끼고 참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긍정의 신이든, 허무주의의 신이든, 아니면 기독교의 신이 되었든 그는 "잠자는 신"의 부정을 통해서 "활동하는 신"을 찾는 것이다.
니체는 형이상학적 신의 죽음을 말하면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과도함 쾌락 그리고 힘에로의 의지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그가 비판한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아덴의 스토아학파들과 논쟁을 하며 소개한 바로 그 신이다. 바울은 "그(神)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전하였다.
니체가 겪었던 19세기의 기독교에 있어서 자유주의는 참된 하나님을 이성의 사유에 가두거나 지나치게 현실을 외면함으로서 니체나 칼 막스(Karl Mark)를 낳았던 것이다. 니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외면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종교를 거부하였다. "무신론자로 그의 궁극적 관심이 그에게 신(神)"이라는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평가는 아마도 니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는 결국 신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이 신을 만들려는 기획을 하였던 것이다. 짜라투스트라와 그 이후에 저작들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그는 말년에 이성을 상실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니체는 존재자 자체를 가치로 해석하였다. 결국 심미적 상태에서 지니는 가치는 존재자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이다. 니체에게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변환되는 가치에 있는 것이다. 원숭이로부터 인간 그리고 초인으로 가는 줄타기를 하는 무엇으로서의 가치이다. 결국 심리적 형태의 니힐리즘은 현대적 형이상학이라고 하이데거는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는 권력에의 의지이며--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너희 자신도 또한 권력에의 의지이며--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심리학은 권력에의 의지가 갖는 제(諸)형태와 제(諸)단계들에 대한 설이다. 이미 데카르트의 인식은 심리학의 일부였다. 단지 심리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하이데거는 지적하고 있다.
) 하이데거, 「니체와 니힐리즘」, 106-7.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자신이 새로운 신을 가르치려고 하였고, 실로 자신이 신적 존재가 되려고 하였다. 예수를 죽음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신의 탄생을 짜라투스트라를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짜라투스트라는 신의 죽음을 말하고 자신을 초극하는 자로서 신적 가치의 존재이다. 즉 끊임없이 자신을 초극하여 다음 단계의 목적에 이르는 힘, 힘에의 의지는 니체에게 있어서 신(神)인 것이다. 이 디오니소스적 신은 허무주의를 통하여 반항적 힘을 통하여 자신을 초극하는 초인인 것이다. 이러한 신은 강해야 하며 자신을 초극해야하기에 늘 긍정에만 의지하는 나약한 인간을 보호하거나 병약한 자들을 남겨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 진화의 과정을 퇴화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도덕을 폐기하고 성실하게 살아감으로서 도덕을 극복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가 도덕을 폐기하고 용기를 가지고 투쟁하고 야수성을 드러낼 때에 인간은 점점 더 강해지고 더 드높은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 광기에 차고 무질서하며 정신의 귀중한 소산을 상실하는 것이다. 자신을 이끌어가던 양심의 도덕을 버림으로 짐승이 되는 것이다. 니체는 결국 양심의 가책에 대하여 "양심을 깨문다는 것은 개가 돌을 깨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설명하였다.
) Nietzsche,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457.
니체가 순수 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말은 순수한 정신은 대상이 없이 홀로 파악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으면서 대상을 파악하는 힘이라면 주체인 것이다. 주체는 대상을 파악하고 인식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순히 변천하는 과정의 가치가 아니라 존재이며 목적이다. 타자를 대상화하는 지력(知力)은 주체의 의식이다. 이것은 그 기원이 물질 또는 대지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精神)의 소산인 것이다.
그는 형이상학적 구조의 구성체인 개념의 세계를 배격하였으나 개념의 세계는 역동적 삶의 세계에 대한 표현이 지니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경험과 함께 혹은 인식과 함께 연동하여 의미를 전달한다. 개념은 허구의 틀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언어가 편견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읽고 해석하는 해석자의 경험이 의미생성에 역동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모든 인식구조가 그렇다. 인식구조는 인식자의 경험과 더불어 이해된다. 허구적 틀이 틀로서만 이해된다면, 인식구조의 형태가 그대로 전달되지 않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이 역동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진행과정에서 생겨난 정신이라면 그 정신은 야수성에 젖어 있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심미적 정신은 보이지 않는 생각의 공간에 정형의 틀 또는 역동적 패러다임을 구성하고 나아갈 정향성을 설정한다. 그 정향성의 목적지에 신의 의지가 있는 것이다. 그 근원에 신의 손길이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 신의 참여가 있는 것이다. 신에 대한 증명이 없이 왜 필자는 신의 손길(창조), 참여(사역), 의지(구속)가 있다고 말하는가? 신(神)은 내 삶의 기원이기에, 인간은 신을 느끼고 참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긍정의 신이든, 허무주의의 신이든, 아니면 기독교의 신이 되었든 그는 "잠자는 신"의 부정을 통해서 "활동하는 신"을 찾는 것이다.
니체는 형이상학적 신의 죽음을 말하면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과도함 쾌락 그리고 힘에로의 의지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그가 비판한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아덴의 스토아학파들과 논쟁을 하며 소개한 바로 그 신이다. 바울은 "그(神)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전하였다.
니체가 겪었던 19세기의 기독교에 있어서 자유주의는 참된 하나님을 이성의 사유에 가두거나 지나치게 현실을 외면함으로서 니체나 칼 막스(Karl Mark)를 낳았던 것이다. 니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외면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종교를 거부하였다. "무신론자로 그의 궁극적 관심이 그에게 신(神)"이라는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평가는 아마도 니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는 결국 신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이 신을 만들려는 기획을 하였던 것이다. 짜라투스트라와 그 이후에 저작들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그는 말년에 이성을 상실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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