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며….
Ⅱ 여운형은 누구인가?
Ⅲ 시대에 따른 그의 행동에 나타난 사상
Ⅳ 맺는 말
별 지 #1
별 지 #2
Ⅱ 여운형은 누구인가?
Ⅲ 시대에 따른 그의 행동에 나타난 사상
Ⅳ 맺는 말
별 지 #1
별 지 #2
본문내용
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 동안 김구는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임시정부를 계속 옮겼다. 그는 중경에 임시정부를 두고 일제의 패망이 짙어지자 한국독립당을 강화하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광복군의 국내 진주를 보지 못하고 해방을 맞았다. 그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고국 땅에 돌아왔다. 이제 두 사람은 새로운 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해방정국에서의 상이한 활동
두 사람은 한동안 활동지역을 달리했다가 이제 해방조국에서 만난 것이다. 김구는 해방된 조국 땅에 왔으나 개인자격이어서 미군정으로부터 찬밥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해방되던 해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우리 나라를 최고 5년간 신탁통치 한다는 조항을 발표했다. 이에 김구와 임정측은 즉각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반대운동에 나섰다. 다시 말해 36년간 식민지로 있었던 것도 통탄스러운데 다시 몇 년 동안 식민지 상태가 되어서야 되겠느냐는 논리였다.
여운형은 해방을 맞이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정권인수 태세를 갖추었으나 이 또한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여운형은 미군정에 맞서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처음 미군정이 찬탁을 들고 나왔을 적에 여운형은 여기에 찬동했던 것이다.
흔히 반탁은 민족주의 진영에서 벌였고 찬탁은 공산주의 진영에서 벌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지 않다. 어쨌든 이 방향의 대립은 김구와 여운형의 노선을 영원히 갈라놓았다.
앞에서 김구는 공산당을 철저히 싫어한다고 말했는데 이때 김구는 여운형을 공산주의자로 본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한국독립당과 조선인민당은 적대관계로 대립하였다. 사실 오늘날 학자들은 여운형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다만 통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다만 중도 좌파의 노선을 걸었다고 본다.
김구는 이승만과 때로 같은 노선을 걷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했으나 공산주의자를 철저히 미워하는 점에서는 같았다. 이에 비해 여운형은 중간노선을 걸으며 타협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분명히 김구와 여운형을 견제하면서 대립을 유도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단독정부의 수립을 주장하고 나왔다. 이에 한민당과 미군정도 단독정부 수립의 방침을 굳혔고, 김구는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나왔다. 그리고 직접 남북협상을 벌이려 북쪽으로 가서 김일성과도 만났다. 여운형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는 것을 보고 이 위원회를 다시 열게 하여 끝까지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추진하려 했다. 곧 점령국 당사자의 힘을 빌려 잠정정부를 세우고 이어 통합정부를 추진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런 방향은 기본적으로는 두 사람이 같았으나 따지고 보면 그 절차에 있어서는 격차가 크게 벌어져 있었다. 김구는 여운형과의 대화나 협력을 절대 거부했고 여운형도 고집스런 임정계열과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구의 성격은 고집스럽고 소신에 강하였고 여운형의 성격은 타협적이면서 인정에 약하였다. 또 김구는 고루하면서 의지에 차 있었고 여운형은 진취적이면서 정세에 밝았다.
두 사람은 알다시피 암살을 당했다. 여운형이 먼저 죽었으나 그 죽음의 의미를 김구는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한 사람의 라이벌이 죽은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구도 여운형의 죽음과 같은 조건으로 죽었다.
그 암살자의 말은 여운형이 공산주의자이기에 죽였다는 것이요 김구가 공산당원을 거느리고 일을 꾸몄기에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음모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친일파와 단정파의 합작품이 아니겠는가?
두 사람은 이처럼 운명을 같이했으나 그들의 성격만이 아니라 행동노선도 사뭇 달랐던 것이다. 김구는 집념이 강해 한 쪽만을 집착하여 처음 독립투쟁에서 폭력노선을 추구하다가 무장투쟁노선(광복군과 같은 조직투쟁)으로 전환하였다. 여운형은 논리적이어서 여러 방향을 추구하면서 처음부터 역량의 결집과 무장투쟁노선을 취하였다.
두 사람은 반봉건 반제운동에는 노선을 같이했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대한'과 '조선'이라는 명칭, 임시정부 고수파와 정당활동 추구파, 반탁과 찬탁 등에서 사뭇 달라 서로 어우러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결코 영원한 동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일념만은 그 우열을 따지는 것이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인간은 참으로 오묘한 감정을 지니고 있어서 같은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그 찾아가는 길이 다름을 여기에서도 보게 된다.
그 동안 김구는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임시정부를 계속 옮겼다. 그는 중경에 임시정부를 두고 일제의 패망이 짙어지자 한국독립당을 강화하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광복군의 국내 진주를 보지 못하고 해방을 맞았다. 그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고국 땅에 돌아왔다. 이제 두 사람은 새로운 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해방정국에서의 상이한 활동
두 사람은 한동안 활동지역을 달리했다가 이제 해방조국에서 만난 것이다. 김구는 해방된 조국 땅에 왔으나 개인자격이어서 미군정으로부터 찬밥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해방되던 해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우리 나라를 최고 5년간 신탁통치 한다는 조항을 발표했다. 이에 김구와 임정측은 즉각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반대운동에 나섰다. 다시 말해 36년간 식민지로 있었던 것도 통탄스러운데 다시 몇 년 동안 식민지 상태가 되어서야 되겠느냐는 논리였다.
여운형은 해방을 맞이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정권인수 태세를 갖추었으나 이 또한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여운형은 미군정에 맞서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처음 미군정이 찬탁을 들고 나왔을 적에 여운형은 여기에 찬동했던 것이다.
흔히 반탁은 민족주의 진영에서 벌였고 찬탁은 공산주의 진영에서 벌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지 않다. 어쨌든 이 방향의 대립은 김구와 여운형의 노선을 영원히 갈라놓았다.
앞에서 김구는 공산당을 철저히 싫어한다고 말했는데 이때 김구는 여운형을 공산주의자로 본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한국독립당과 조선인민당은 적대관계로 대립하였다. 사실 오늘날 학자들은 여운형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다만 통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다만 중도 좌파의 노선을 걸었다고 본다.
김구는 이승만과 때로 같은 노선을 걷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했으나 공산주의자를 철저히 미워하는 점에서는 같았다. 이에 비해 여운형은 중간노선을 걸으며 타협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분명히 김구와 여운형을 견제하면서 대립을 유도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단독정부의 수립을 주장하고 나왔다. 이에 한민당과 미군정도 단독정부 수립의 방침을 굳혔고, 김구는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나왔다. 그리고 직접 남북협상을 벌이려 북쪽으로 가서 김일성과도 만났다. 여운형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는 것을 보고 이 위원회를 다시 열게 하여 끝까지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추진하려 했다. 곧 점령국 당사자의 힘을 빌려 잠정정부를 세우고 이어 통합정부를 추진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런 방향은 기본적으로는 두 사람이 같았으나 따지고 보면 그 절차에 있어서는 격차가 크게 벌어져 있었다. 김구는 여운형과의 대화나 협력을 절대 거부했고 여운형도 고집스런 임정계열과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구의 성격은 고집스럽고 소신에 강하였고 여운형의 성격은 타협적이면서 인정에 약하였다. 또 김구는 고루하면서 의지에 차 있었고 여운형은 진취적이면서 정세에 밝았다.
두 사람은 알다시피 암살을 당했다. 여운형이 먼저 죽었으나 그 죽음의 의미를 김구는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한 사람의 라이벌이 죽은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구도 여운형의 죽음과 같은 조건으로 죽었다.
그 암살자의 말은 여운형이 공산주의자이기에 죽였다는 것이요 김구가 공산당원을 거느리고 일을 꾸몄기에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음모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친일파와 단정파의 합작품이 아니겠는가?
두 사람은 이처럼 운명을 같이했으나 그들의 성격만이 아니라 행동노선도 사뭇 달랐던 것이다. 김구는 집념이 강해 한 쪽만을 집착하여 처음 독립투쟁에서 폭력노선을 추구하다가 무장투쟁노선(광복군과 같은 조직투쟁)으로 전환하였다. 여운형은 논리적이어서 여러 방향을 추구하면서 처음부터 역량의 결집과 무장투쟁노선을 취하였다.
두 사람은 반봉건 반제운동에는 노선을 같이했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대한'과 '조선'이라는 명칭, 임시정부 고수파와 정당활동 추구파, 반탁과 찬탁 등에서 사뭇 달라 서로 어우러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결코 영원한 동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일념만은 그 우열을 따지는 것이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인간은 참으로 오묘한 감정을 지니고 있어서 같은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그 찾아가는 길이 다름을 여기에서도 보게 된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