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진보사상
2) 17세기까지의 진보사상
3) 18세기의 진보사상
4) 19세기의 진보사상
5) 진보사상의 정립은 필요한가?
2) 17세기까지의 진보사상
3) 18세기의 진보사상
4) 19세기의 진보사상
5) 진보사상의 정립은 필요한가?
본문내용
정될 수 없다는 점이다. 사실, 여러 시기들과 여러 영역들에서 정체적 또는 후퇴적인 현상들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며, 善의 증대도 항상 惡의 증대를 수반해왔다. 또한 진보를 인정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모든 단계들을 단지 미래를 위한 수단과 도구로 간주하게끔 하는 것이며, 우리들로 하여금 현재에 대해, 역사에 대해 경건한 자세를 세울 필요가 없게끔 만들 수도 있겠다. 진보의 내용과 기준이 규정될 때 그것은, 영원의 제국이나 공산사회라는 개념들처럼 현실을 속박할 수도 있으며, 역사에 대한 해석도 도식적으로 강요될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사상은 파기되어야 하는가?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것이며, 그러할 필요도 없겠다. 왜냐하면 근세의 시작과 함께 역사생활은 이미 미래를 전망하는 진보사상과 함께, 그것이 학문적 이론을 갖출 수 있는 것이건 아니건 간에, 발전해 왔다. 특히 19세기에는 이 사상이, 비록 제약을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의 발달과 함께 자유주의적 역사가들에게나 일반들에게서도 하나의 일반적인 믿음으로 자리를 잡았다. 요컨대 이 사상은 역사생활에서의 한 정신현상으로 되어 있다. 미래전망은 근세 이전의 시기에서도 고대의 유태인들과 중세의 기독교인들에게서처럼, 비록 종교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구원에 대한 의식의 형식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영원의 제국 대신에 근세인들에게 새로이 세워진 목표가 바로 진보이다. 다시 말하자면 진보사상은 합리주의적 근세인들에게 더 이상 그대로 수용될 수 없게 된 구원사상이 세속화된 것이다. 중세의 종교를 미신으로까지 멸시했던 계몽사상가들에게서조차도 역사의 완성을 전망하는 그들의 진보사상은 다름아닌 유태교적기독교적 목적론을 수용한 것이며, 이러한 견해는 자유의 완성이나 공산사회의 실현을 전망했던 헤겔과 마르크스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점들에서 볼 때 실로 진보에 대한 믿음은 종교적 믿음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믿음은, 학문적으로 입증하는 작업과는 관계없이, 시간의 경과 속에서 신념으로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역사진행을 재조정하고 질서 속에 진행시키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것은 과학주의자들에게조차도 법칙이론 이상의 신념으로 되고 있다. 요컨대 그것은 이론화 이전의 우리들 정신생활의 현실이다.
진보를 판단할 기준을 굳이 찾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인류역사에 대한 보편사적 관찰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한 시기, 또는 한 영역의 정체나 후퇴가 그 후의 시기 또는 다른 영역에서의 전진을 통해 보상되고 있는 현상들이 고려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보다 더 넓고 긴 전망의 관찰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다 더 확실하게 말한다면, 진보를 인정하고 그 기준을 규정하는 일은 미래의 과제에 속한다. 왜냐하면 역사는 생성과 변화 속에 실현되어야 할 바를 실현시키고 있는 중이고, 그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규명해보고 있는 중이므로, 진보는 역사의 진행 속에서 앞으로 나타날 바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진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 속에서는 善의 증대뿐만 아니라 惡의 증대도 병행되고 있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 직전에 크리스트와 반크리스트의 최후결전을 설정하고 있는 기독교 역사철학에서 반크리스트란 원죄로부터의 악의 출현이 아니라 새로운 악의 출현, 다가올 시대의 악의 출현이라는 점과도 같은 것이다. 요컨대 지상의 역사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국적으로 사고한다면 우리는 숙명론에 빠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이 부인되기 어려운 것인 한, 진보에 대한 믿음, 이것을 실현한다는 것은 학문적 근거에서가 아니라 역사적 의무에서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진보사상은 파기되어야 하는가?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것이며, 그러할 필요도 없겠다. 왜냐하면 근세의 시작과 함께 역사생활은 이미 미래를 전망하는 진보사상과 함께, 그것이 학문적 이론을 갖출 수 있는 것이건 아니건 간에, 발전해 왔다. 특히 19세기에는 이 사상이, 비록 제약을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의 발달과 함께 자유주의적 역사가들에게나 일반들에게서도 하나의 일반적인 믿음으로 자리를 잡았다. 요컨대 이 사상은 역사생활에서의 한 정신현상으로 되어 있다. 미래전망은 근세 이전의 시기에서도 고대의 유태인들과 중세의 기독교인들에게서처럼, 비록 종교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구원에 대한 의식의 형식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영원의 제국 대신에 근세인들에게 새로이 세워진 목표가 바로 진보이다. 다시 말하자면 진보사상은 합리주의적 근세인들에게 더 이상 그대로 수용될 수 없게 된 구원사상이 세속화된 것이다. 중세의 종교를 미신으로까지 멸시했던 계몽사상가들에게서조차도 역사의 완성을 전망하는 그들의 진보사상은 다름아닌 유태교적기독교적 목적론을 수용한 것이며, 이러한 견해는 자유의 완성이나 공산사회의 실현을 전망했던 헤겔과 마르크스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점들에서 볼 때 실로 진보에 대한 믿음은 종교적 믿음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믿음은, 학문적으로 입증하는 작업과는 관계없이, 시간의 경과 속에서 신념으로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역사진행을 재조정하고 질서 속에 진행시키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것은 과학주의자들에게조차도 법칙이론 이상의 신념으로 되고 있다. 요컨대 그것은 이론화 이전의 우리들 정신생활의 현실이다.
진보를 판단할 기준을 굳이 찾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인류역사에 대한 보편사적 관찰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한 시기, 또는 한 영역의 정체나 후퇴가 그 후의 시기 또는 다른 영역에서의 전진을 통해 보상되고 있는 현상들이 고려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보다 더 넓고 긴 전망의 관찰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다 더 확실하게 말한다면, 진보를 인정하고 그 기준을 규정하는 일은 미래의 과제에 속한다. 왜냐하면 역사는 생성과 변화 속에 실현되어야 할 바를 실현시키고 있는 중이고, 그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규명해보고 있는 중이므로, 진보는 역사의 진행 속에서 앞으로 나타날 바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진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 속에서는 善의 증대뿐만 아니라 惡의 증대도 병행되고 있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 직전에 크리스트와 반크리스트의 최후결전을 설정하고 있는 기독교 역사철학에서 반크리스트란 원죄로부터의 악의 출현이 아니라 새로운 악의 출현, 다가올 시대의 악의 출현이라는 점과도 같은 것이다. 요컨대 지상의 역사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국적으로 사고한다면 우리는 숙명론에 빠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이 부인되기 어려운 것인 한, 진보에 대한 믿음, 이것을 실현한다는 것은 학문적 근거에서가 아니라 역사적 의무에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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