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케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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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랑케

2. 랑케 사학의 특징
(1) 엄격한 사료비판
(2) 도덕적 중립성과 정치사관
(3) 철학으로부터의 독립
(4) 역사에 있어서의 ꡐ신의 손길ꡑ
(5)세게사의 과제

3. 랑케사학의 객관적 사관 주장이유

4. 랑케사학에 대한 비판

5. 평가

본문내용

왔다. 그러나 그는 역사를 결코 합리주의적, 과학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 그에게서는 神性이 내재하는 모든 시대의 경향성들, 그 이념들이란 예감될 수 있을 뿐이지 법칙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는 예술임과 동시에 학문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모호한 개념들을 가끔 사용했지만, 그의 방법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다. 여기에 바로 그에 대한 우리들의 신뢰가 있는 것이다. 그는 실증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불신했다. 그가 인기를 끌었던 것은 강의에서보다는 세미나에서였다. 본시 세미나는 1787년에 볼프가 할레대학에서 언어학연구에 도입했었고, 가터러가 보조과학에 관한 연구에서 응용했었다. 랑케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뵈크가 언어학연구에서, 또 헤르만(Hermann)이 그리스문학 연구에서 행했던 세미나에 참석한 바 있었고, 베를린대학에서는 자신의 중세사연구에서 이를 도입했었다. 이 때부터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많이 참석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여기에서 많은 후진 역사가들이 배출되었다. 그는 이론을 전제하지 않고 실천적으로 접근했으며, 비판주의와 정밀주의를 강조했었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실증주의적인 것처럼 오해되어 왔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즉 그의 접근태도는 실증주의자들이 그것과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에게서의 결점은, 우선 역사파악에 있어서 그가 사건들을 주로 정치사적으로만 이해했었고, 주로 외교문서들을 근거로 했으며, 경제사적, 사회사적관계들을 소홀히 했다는 저에 있다. 물론 그는 정치사 이외에도 종교생활을 또한 취급했었다. 그러나 그는 한 시대의 여러 생활 영역들을 병행적으로 고려하지는 못했다. 연구방법에 있어서 그는 자신을 해소한다는 태도는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선 불가능한 일이거니와 사물의 내면에로 몰입하는 행위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역사사상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는 개체사상과 결부된 국가사상은 현실적으로 권력지향에 응용될 수 있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는 유럽 국가들의 체제를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의도를 세력균형 속에서 스스로 수정해 나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그들은 상호간의 대립투쟁 속에서 상호 파괴로 나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그가, 부르크하르트와는 달리, 미래전망을 결여라고 있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로 그는 미래전망은 모호했고, 그것은 그의 역사사고에서 별다른 작용을 하지 못했다.
그에 대해서는 당대에서뿐만 아니라 후세에서도 적지 않은 비판이 있었다. 민족주의자들은 그의 세계시민적 태도를 비판했고, 도덕주의자들은 그의 윤리적 中道主義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런가 하면 물질주의자들은 그의 애매한 超越主義를 비난했다. 몸젠은 그의 90회 생일 때, 선생님은 우리들 가운데 가장 관대한 분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넌지시 항의했는가 하면, 지벨은, 그가 역사를 정치가적인 눈이 아니라 예술가적인 눈으로 관찰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보다 더 강한 반발은 민족통일과 자유를 위한 정열적인 투사이자 역사이론가였던 드로이젠에게서 나왔다. 즉, 그는 빌헬름 4세가 세습황제로 추대된 후 랑케와 동석한 자리에서 이 老大家로부터, 젊은 역사가들의 현실주의적 태도가 과도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받고는, 우리들과 선생님 중에서 누가 역사를 보다 더 잘 이해했는지를 언젠가는 역사가 알게 해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러한 불만과 비판들보다 더 철저하게 방법론적으로 랑케를 비판하는 공격은 19세기 말의 람프레히트에 의해 제기되었다.
5. 평가
그가 초현실적, 세계시민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전혀 자신의 민족적, 국가적 현실로부터 벗어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당시대의 인물이었으므로, 비록 당대의 소용돌이로부터 초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나, 역시 프러시아 君主制의 충복으로서 국가와 교회의 변호자였다. 말하자면 그 자신이 이미 자신의 주관적 견해 속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가 대중을 거의 관심 밖에 두었던 것은 그가 군주제를 신봉했던 만큼이나 기존하는 보수적 정치사상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는 역사적인 것과 정통적인 것이 , 또 비역사적인 것과 혁명적인 것이 각각 동일시되는 면이 있었다. 이것은 그가, 후일의 지벨이 지적했듯이, 윤리적 분노의 감정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상의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그도 역시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가 다음 세대들에게 마치 자기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했던 것처럼 믿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도의 군형을 유지할 줄 알았고, 현실로부터 초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근세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다. 방법론적으로 그는 역사학을 학문의 경지로 고양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사상적으로는 형이상학으로만 끝나지 않는 구체적인 역사철학을 제공했다. 즉 그의 객관주의는, 비록 달성되기 힘드는 것이긴 하지만, 학문적 理想으로서 추구되어야만 하는 것이며, 그의 역사철학은 추상적, 도식적으로 됨이 없이 역사를 현실적으로 사고하는 모형을 제시하여 주었다. 더욱이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그의 종교적 감정은 역사가들이 취해야 할 경건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는 실로 근세 역사학의 비판적 방법과 역사주의사상을 완성시킨 위대한 역사가였다. 우리가 그의 사상을 이해할 때 우리는 역사의 수많은 계곡들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높은 봉우리에 올라선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실로 우리는 그와 함께 세계사의 진행을 의미 있는 그 무엇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吉玄模, "랑케사관의 성격과 위치", 역사의 이론과 서술,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1975), 39-86.
문기상, "Ranke사학의 객관성 -역사와 정치의 관련을 중심으로-", 한국사논집4(1981), 163-176.
심재윤, "Ranke사관의 재고찰", 동국21(1985), 113-121.
이민호, 역사주의-랑케에서 마이네케, 민음사, 1988.
차하순, 현대의 역사사상, 탐구당, 1994
서양사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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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18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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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79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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