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성읍국가와 주거
1)움집[竪穴住居]
2)귀틀집[累木式住居]
3)고상주거(高床住居)
2. 삼국시대의 주택건축
1)고구려
2)백제
3)신라
3. 남북국시대의 주택
1)통일신라
2)발해
참고문헌
1)움집[竪穴住居]
2)귀틀집[累木式住居]
3)고상주거(高床住居)
2. 삼국시대의 주택건축
1)고구려
2)백제
3)신라
3. 남북국시대의 주택
1)통일신라
2)발해
참고문헌
본문내용
놓지 못하였다. 가구의 바닥은 대모(玳瑁)나 침향(沈香)과 같은 고급재로 꾸미지 못하였다. 그러나 육두품부터 금지된 사항들이 허락되어, 백통[白]으로 꾸미고, 기단에는 두줄의 소맷돌이 있는 계단(二重階)를 놓았으며, 담장 높이는 8척 이상이었고, 대문은 중층 누문이 었고, 집터 주위를 둘러 싼 담장 동서남북 네 곳에 대문을 세웠다. 마굿간에는 말 5필 이상을 두었다.
이처럼 귀족계급의 주택은 상당히 크고 화려한 주택이었으며, 백성들의 주택들도 상당한 수준의 건축이었다. 더욱이 헌강왕(憲康王) 때에는 경주의 시가지에 초가집이 별로 없었고, 연기가 난다하여 숯으로 밥을 지을 형편이었다. 주택 바닥구조는 마루바닥과 전바닥, 흙바닥, 그리고 ㄱ자형 구들바닥으로 이루어졌다고 판단된다. 특히 ㄱ자형 구들바닥은 삼국시대의 백제와 고구려의 구들시설로, 통일이 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보급된 것이다. 그리고 이 ㄱ자형 구들고래는 백제에서 이미 넓은 면적을 이루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아 방안 전체에 구들고래를 놓은 온돌바닥으로 바뀌기 시작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전성기의 경주는 17만8천9백36호의 주택들이 있었고, 시가는 1천3백60방으로, 5십5리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35채의, 일명 부윤대택(富潤大宅)이라 부르는 금입택(金入宅)들이 있었다. 그 이름은 남택(南宅), 그리고 북택(北宅)이라 부르는 4택의 비소택(比所宅), 본피택(本彼宅), 양택(梁宅), 지상택(池上宅) [본피부(本彼部)에 있다]과, 김유신 조상대의 집인 재매정댁(財買井宅), 북유택(北維宅), 남유택(南維宅) [반향사하방(反香寺下坊)에 있다], 대택(隊宅)과, 반향사(反香寺) 북쪽에 있는 빈지택(賓支宅), 장사택(長沙宅), 상앵택(上櫻宅), 하앵택(下櫻宅), 수망택(水望宅), 천택(泉宅), 양남(梁南)에 있는 양상택(楊上宅), 법류사(法流寺) 남쪽의 한기택(漢宅)과 비혈택(鼻穴宅), 분황사(芬皇寺) 상방(上坊)의 판적택(板積宅), 북천(北川)의 별교택(別敎宅), 위남댁(衛南宅), 양관사(梁官寺) 남쪽의 금양종택(金楊宗宅), 북천(北川)의 곡수택(曲水宅), 그리고 유야택(柳也宅), 사하택(寺下宅), 사량택(沙梁宅), 정상택(井上宅), 또 소택(所宅)이라고도 한 리남택(里南宅), 은내곡택(恩內曲宅), 지택(池宅), 한편 대숙택(大宿宅)인 사상택(寺上宅), 임상택(林上宅) [청룡사(靑龍寺)의 동쪽이니, 못이 있다.], 교남택(橋南宅), 본피부(本彼部)의 항질택(巷叱宅), 루상택(樓上宅), 리상택(里上宅), 명남택(椧南宅), 정하택(井下宅)들이다. 또 철따라 옮겨다니며 휴식을 취하던 별장인 사절유택(四節遊宅)들이 있었는데,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에서 지냈다.
2)발해
발해의 주택들에 관한 자료들은 극히 적다. 다만 상경용천부 궁성 안의 침전터와, 팔련성, 서고성에서 일부 찾아볼 수 있고, 이들은 일련의 공통점이 있어 주택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상경용천부 서구의 침전지는 궁성 중구의 침전(제4궁전) 본채와 서쪽채의 평면과 비슷하다. 기단의 길이는 28.9m이고 너비는 17.31m인데, 진흙으로 다지고, 그 위에 진흙과 모래를 엇바꾸어 다진 판축기법으로 축조하였다. 기단 위 중앙에는 3개의 방이 있는데, 중앙의 방이 가장 작고, 좌우의 방이 크다. 출입문은 동서방은 정면에, 가운데 방은 북쪽으로 나있다. 이들 세방 둘레에는 퇴간이 둘러 있다. 벽체는 42-52cm 두께로 안팎으로 회를 발라 붉은색으로 무늬장식을 하였다. 이들 가운데 방과 좌우방, 그리고 이들의 북쪽 퇴간에는 구들이 있는데, 북쪽 퇴간의 것은 한줄이고, 나머지는 두줄 고래이다. 구들바닥은 방바닥 면적의 1/3정도로, 고래는 30cm 높이이고, 10cm 두께의 구들장을 놓았다. 동쪽방과 그 북쪽 퇴간의 구들고래는 합쳐져 북쪽 방 밖으로 뻗어나가 방형평면의 굴뚝에 닿는다. 또 서측방과 퇴간의 구들고래도 마찬가지로 합쳐져 북쪽 방밖의 굴뚝과 닿아 있다. 굴뚝은 사방 5m의 크기이다. 상경룡천부 궁성 남쪽 궁장의 서쪽 3호문지 서문돈(西門墩) 서북모서리의 주거지가 발굴조사되었다. 이 주거지 방안의 서북모서리에는 길이와 너비가 각각 1m되는 방형의 아궁이가 있고, 아궁이의 밑부분은 호형(弧形)에 가깝고, 웃면의 입의 길이와 너비는 각각 0.6m, 깊이는 0.36m이다. 아궁이벽은 돌로 0.2m의 너비로 쌓고, 방바닥보다 0.24m 높다. 아궁이 입구는 남쪽으로 나있는데, 너비 0.4m, 높이 0.25m이다. 아궁이 속 서북모서리에 높이 0.1m, 너비 0.12m의 불구멍이 있다. 구들은 방의 서쪽 벽을 끼고, 두 줄로 만들어 졌는데, 길이 3.3m, 너비 1.15m, 높이 0.35m이다. 고래 위에는 돌판이 덮여 있다. 서남쪽 모서리에 길이 0.7m, 너비 0.92m, 남은 높이 0.4m의 굴뚝자리가 있고, 굴뚝의 안 크기는 길이 0.22m, 너비 0.36m이다.
물론 이상의 두 사례는 왕궁에 속한 것으로 귀족계급의 주택은 아니지만, 고구려의 집안 동대자주거지와 흡사한 것으로 보아 발해의 귀족계급의 주택도 같은 모습이었다고 판단 되며, 발해의 주택은 고구려의 주택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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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윤무병, 韓國支石墓硏究, 國立博物館古蹟調査報告書 第6冊, 1969.
국립중앙박물관, 松菊里Ⅰ, 1979.
국립중앙박물관, 松菊里Ⅱ, 1986.
국립중앙박물관, 松菊里Ⅲ, 1987.
국립중앙박물관, 松菊里Ⅳ, 1991.
임효재, 한국고대문화의 흐름, 집문당.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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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웅, 한국의 민가 연구, 보진제. 1981.
주남철, 한국주택의 변천과 발달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1962.
이처럼 귀족계급의 주택은 상당히 크고 화려한 주택이었으며, 백성들의 주택들도 상당한 수준의 건축이었다. 더욱이 헌강왕(憲康王) 때에는 경주의 시가지에 초가집이 별로 없었고, 연기가 난다하여 숯으로 밥을 지을 형편이었다. 주택 바닥구조는 마루바닥과 전바닥, 흙바닥, 그리고 ㄱ자형 구들바닥으로 이루어졌다고 판단된다. 특히 ㄱ자형 구들바닥은 삼국시대의 백제와 고구려의 구들시설로, 통일이 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보급된 것이다. 그리고 이 ㄱ자형 구들고래는 백제에서 이미 넓은 면적을 이루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아 방안 전체에 구들고래를 놓은 온돌바닥으로 바뀌기 시작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전성기의 경주는 17만8천9백36호의 주택들이 있었고, 시가는 1천3백60방으로, 5십5리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35채의, 일명 부윤대택(富潤大宅)이라 부르는 금입택(金入宅)들이 있었다. 그 이름은 남택(南宅), 그리고 북택(北宅)이라 부르는 4택의 비소택(比所宅), 본피택(本彼宅), 양택(梁宅), 지상택(池上宅) [본피부(本彼部)에 있다]과, 김유신 조상대의 집인 재매정댁(財買井宅), 북유택(北維宅), 남유택(南維宅) [반향사하방(反香寺下坊)에 있다], 대택(隊宅)과, 반향사(反香寺) 북쪽에 있는 빈지택(賓支宅), 장사택(長沙宅), 상앵택(上櫻宅), 하앵택(下櫻宅), 수망택(水望宅), 천택(泉宅), 양남(梁南)에 있는 양상택(楊上宅), 법류사(法流寺) 남쪽의 한기택(漢宅)과 비혈택(鼻穴宅), 분황사(芬皇寺) 상방(上坊)의 판적택(板積宅), 북천(北川)의 별교택(別敎宅), 위남댁(衛南宅), 양관사(梁官寺) 남쪽의 금양종택(金楊宗宅), 북천(北川)의 곡수택(曲水宅), 그리고 유야택(柳也宅), 사하택(寺下宅), 사량택(沙梁宅), 정상택(井上宅), 또 소택(所宅)이라고도 한 리남택(里南宅), 은내곡택(恩內曲宅), 지택(池宅), 한편 대숙택(大宿宅)인 사상택(寺上宅), 임상택(林上宅) [청룡사(靑龍寺)의 동쪽이니, 못이 있다.], 교남택(橋南宅), 본피부(本彼部)의 항질택(巷叱宅), 루상택(樓上宅), 리상택(里上宅), 명남택(椧南宅), 정하택(井下宅)들이다. 또 철따라 옮겨다니며 휴식을 취하던 별장인 사절유택(四節遊宅)들이 있었는데,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에서 지냈다.
2)발해
발해의 주택들에 관한 자료들은 극히 적다. 다만 상경용천부 궁성 안의 침전터와, 팔련성, 서고성에서 일부 찾아볼 수 있고, 이들은 일련의 공통점이 있어 주택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상경용천부 서구의 침전지는 궁성 중구의 침전(제4궁전) 본채와 서쪽채의 평면과 비슷하다. 기단의 길이는 28.9m이고 너비는 17.31m인데, 진흙으로 다지고, 그 위에 진흙과 모래를 엇바꾸어 다진 판축기법으로 축조하였다. 기단 위 중앙에는 3개의 방이 있는데, 중앙의 방이 가장 작고, 좌우의 방이 크다. 출입문은 동서방은 정면에, 가운데 방은 북쪽으로 나있다. 이들 세방 둘레에는 퇴간이 둘러 있다. 벽체는 42-52cm 두께로 안팎으로 회를 발라 붉은색으로 무늬장식을 하였다. 이들 가운데 방과 좌우방, 그리고 이들의 북쪽 퇴간에는 구들이 있는데, 북쪽 퇴간의 것은 한줄이고, 나머지는 두줄 고래이다. 구들바닥은 방바닥 면적의 1/3정도로, 고래는 30cm 높이이고, 10cm 두께의 구들장을 놓았다. 동쪽방과 그 북쪽 퇴간의 구들고래는 합쳐져 북쪽 방 밖으로 뻗어나가 방형평면의 굴뚝에 닿는다. 또 서측방과 퇴간의 구들고래도 마찬가지로 합쳐져 북쪽 방밖의 굴뚝과 닿아 있다. 굴뚝은 사방 5m의 크기이다. 상경룡천부 궁성 남쪽 궁장의 서쪽 3호문지 서문돈(西門墩) 서북모서리의 주거지가 발굴조사되었다. 이 주거지 방안의 서북모서리에는 길이와 너비가 각각 1m되는 방형의 아궁이가 있고, 아궁이의 밑부분은 호형(弧形)에 가깝고, 웃면의 입의 길이와 너비는 각각 0.6m, 깊이는 0.36m이다. 아궁이벽은 돌로 0.2m의 너비로 쌓고, 방바닥보다 0.24m 높다. 아궁이 입구는 남쪽으로 나있는데, 너비 0.4m, 높이 0.25m이다. 아궁이 속 서북모서리에 높이 0.1m, 너비 0.12m의 불구멍이 있다. 구들은 방의 서쪽 벽을 끼고, 두 줄로 만들어 졌는데, 길이 3.3m, 너비 1.15m, 높이 0.35m이다. 고래 위에는 돌판이 덮여 있다. 서남쪽 모서리에 길이 0.7m, 너비 0.92m, 남은 높이 0.4m의 굴뚝자리가 있고, 굴뚝의 안 크기는 길이 0.22m, 너비 0.36m이다.
물론 이상의 두 사례는 왕궁에 속한 것으로 귀족계급의 주택은 아니지만, 고구려의 집안 동대자주거지와 흡사한 것으로 보아 발해의 귀족계급의 주택도 같은 모습이었다고 판단 되며, 발해의 주택은 고구려의 주택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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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철, 한국주택의 변천과 발달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