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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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다.
경복궁 증건 이후에도 경운궁(慶運宮)증건이 2차례나 시행되었다. 경운궁은 임진왜란 직후에 잠시 동안 궁궐로 사용되다가 창덕궁 및 창경궁이 증건된 뒤에는 더 이상 왕의 거처로 쓰이지 않았는데, 20세기초에 와서 다시 중요한 궁궐로 부각되었다. 왜냐하면, 경복궁 안에까지일본인들이 침입하여 왕비를 살해한 사태에 처하게 되자, 당시 주변의외국 궁사관들이 밀집해있던 경운궁으로 왕실이 피신하기 위하여 대규모 건축공사를 벌여 완궁다운 궁궐로 변모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경운궁은 전통적인 궁궐제도에 입각한 배치 형식을 취하면서도, 정전의 주변부에 서양식 궁전 건물과 정월을 갖춘 독특한 궁궐 건축으로만들어 졌다. 경운궁에 이르러 한국의 궁궐 건축은 동양 문화와 서양문화가 절충된 양식으로 급격히 변모하였다. 이후 외세의 개입이 심화되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한국의 건축도 일본화 서양화의 길로 치닫게 된다. 일본에 의하여 왕위에서 강제로 쫓겨난 고종은 이 경운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고 여기서 남은 생애를 울분 속에서 보냈다. 덕수궁이란 이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처럼 고유명사가 아니며왕위를 물려 준 상왕(上王)이 거처하던 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보통명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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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06
  • 저작시기2005.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8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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