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경우는 조선의 대중들은 여전히 자유주의적인 서구 이념에 낯설어했고, 서구화된 귀족들은 대중의 사회적 신뢰를 거의 얻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확고한 제도적 또는 재정적 기초 없이 활동했다.
정부권력을 대신할 수 있는 세력이 없었기에 독립협회는 조직된 동맹자도 구할 수 없었으며, 개혁을 위한 대한도 제시할 수 없었으며, 대중계몽의 기반도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민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정부를 비판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그들의 개혁노력은 용감하고 시의적절 한 것 이지만 지속시킬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그들은 이데올로기적 뿌리도 조직적인 뿌리도 없었다. 당시 조선의 정치적 결집의 형식으로서는 가장 서구의 이념과 방법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것은 앞서 말한 네 가지 형태의 리더십 가운데 가장 성공률이 낮고 점점 왜곡되고 은폐되어가는 종류의 것이다.
외세의 정치적 대중동원, 일진회
일본과 조선내부에 있는 친일파들이 1905~1910년에 이르는 기간에, 일본의 조선 합병에 대한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회득하는데 성공한 방법은 자기민족을 상대로 행해진 반민족주의적 대중운동으로서 정치학의 희귀한 사례 중 하나다.
1884~1904년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외국세력에 시소게임 속에서 개혁에 뜻을 둔 조선인들에게, 청나라는 가장 반동적이고, 제정 러시아도 별반 차이가 없으며, 미국은 조선에 무관심하고, 대한제국정부는 무능한 것으로 인식 되어졌다.하지만 메이지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일본은 그들을 고무시키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 수 천명의 이주자를 보내 효율적인 시장망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있었고, 가장 활동적인 고문단과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개혁자들은 대부분이 일본을 목표로 삼고 있었으며, 일본도 전반적으로 그들을 지원했다.
조선사회는 더욱 정부의 지도력과 집단적 응집력이 없어지고 계급과 사회적 경계가 혼란에 빠져있었다. 대원군에 의한 관료세계, 동학당의 대중세계, 독립협회의 지적 노력 등 이들 모두가 1890년대가 끝날 즈음엔 지도자는 물론 응집력 자체를 잃고 있었다.
러일전쟁발발 이후 일본은 상대적으로 개혁적이고,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와 언어가 상대적으로 이질적이지 않고, 유학생 교환에도 적극적이었다. 따라서 일본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위로부터의 행정개혁과 그에 따른 전통적인 사회적 균형의 붕괴는 결국 외국의 점령을 조장하고 말았다.
이러한 시기에 송병준, 손병희, 이용구는 국가의 진보와 개인적 성공을 위해서는 일본과 제휴해야 하며,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손병희와 이용구는 동학당 지도자였는데 손병희는 동학당 내부의 일본지원운동을 촉진하고, 이용구는 그것을 지도했다.
손병준은 일본에서 귀국한 엘리트를 중심으로 좀더 소규모의 지도자집단은 조직하고 일본을 지지한다. 이것이 일진회다.
이로 인해 일본은 조선일반사회에 대화 채널을 가지게 되고 일진회는 일본이 지배하는 조선정부안에 로비채널을 가지게 되었다. 일진회는 정부의 중요포스트에 많은 지지자들을 배치하고 이들을 정치적사회적 동원의 중요한 채널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진회는 조직이 커지자 더욱 적극적 친일을 표방한다.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을 지지하는 대중운동을 벌였으며, 조선국왕(고종)의 퇴위를 요구하는 대중운동으로, 최후에는 조선합병을 직접 지지하는 대중운동으로 까지 발전했다.
일진회의 이러한 행위는 한국 역사상 하나의 정당을 위해 대중적 지지를 동원한 최초의 시도이다. 즉, 한국에서 최초로 성공한 정당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국민운동이었으며, 대중집회, 공개연설, 포스터, 대규모재정원조 및 일반적 국가문제에 관한 압력공작 등 여러 기교를 구사했다
하지만 일진회는 폭력적 하층계급의 방법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절차가 있었다. 그들은“일본의 이익에 해를 끼치는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을 임으로 체포하고, 불법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6인 위원회를 임명하여 법정에 파견하였다. 이후 일진회의 과격주의 때문에 1906년 동학당이 일진회로부터 분리(1905 년 12월 1일에 천도교로 개칭), 이를 계기로 일진회가 점차 세력을 잃었으며, 마침내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일본 자신의 손으로 해산한다.
일진회는 신흥 개발국의 정치적 대중동원에 관한 사례를 보여준다. 일본의 식민지적 야심은, 대중의 중립화는 필요하다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전쟁과 철도 건설은 이런 동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을 조성했고, 종교적 조직은 기성의 조직망을 제공했다. 전통의 붕괴는 낡은 계급이나 가치에 얽매이지 않는 신인들을 해방했다. 이런 신인들은 부동적이며 그들 가운데는 권력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앞잡이와 지도자로 봉사하려고 안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기꺼이 낡은 유교정치의 족쇄를 부수었다.
조선은 더 이상 지배체제를 갖고 있지 않았다. 점차 적응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수단이나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정치적 리더쉽은 정치적 기회를 포착하는 민첩성이 도덕이나 정직성보다도 중요하게 되었다.
대중들은 새로 등장한 정치 조작자들과 마찬가지로 중간조직에 대한 열정과 충성심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정치노선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무소속의 중립적인 일반대중들은 쉽게 이용될 수 있었다.일반대중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보수와 외국의 보호가 대중을 동원하는 주된 설득력이었다.
하지만 일진회가 일순가 사라진 것은 진정한 집단적 충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대중들은 독립이 상실되는 문제의 경우에도 그들 위에 형성된 조직 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용되고, 조종당하였다.
일진회가 일시적으로 성공했다는 것은 일본 지배시대의 도래에 반대하는 대중봉기의 위협을 크게 중화시켰다. 그 후 대중들의 돌연하고 급격한 노출은 시저리즘(전제정치)을 가져왔고, 심지어 독립까지 잃게 되었다.
1890년부터 1901년까지 현대의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한국은 이미 사회적 계층이동 상황에 도달했는데, 한국은 그런 대중사회의 위험한 의외성과 불안정성을 아주 일찍이 경험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확고한 제도적 또는 재정적 기초 없이 활동했다.
정부권력을 대신할 수 있는 세력이 없었기에 독립협회는 조직된 동맹자도 구할 수 없었으며, 개혁을 위한 대한도 제시할 수 없었으며, 대중계몽의 기반도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민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정부를 비판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그들의 개혁노력은 용감하고 시의적절 한 것 이지만 지속시킬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그들은 이데올로기적 뿌리도 조직적인 뿌리도 없었다. 당시 조선의 정치적 결집의 형식으로서는 가장 서구의 이념과 방법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것은 앞서 말한 네 가지 형태의 리더십 가운데 가장 성공률이 낮고 점점 왜곡되고 은폐되어가는 종류의 것이다.
외세의 정치적 대중동원, 일진회
일본과 조선내부에 있는 친일파들이 1905~1910년에 이르는 기간에, 일본의 조선 합병에 대한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회득하는데 성공한 방법은 자기민족을 상대로 행해진 반민족주의적 대중운동으로서 정치학의 희귀한 사례 중 하나다.
1884~1904년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외국세력에 시소게임 속에서 개혁에 뜻을 둔 조선인들에게, 청나라는 가장 반동적이고, 제정 러시아도 별반 차이가 없으며, 미국은 조선에 무관심하고, 대한제국정부는 무능한 것으로 인식 되어졌다.하지만 메이지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일본은 그들을 고무시키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 수 천명의 이주자를 보내 효율적인 시장망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있었고, 가장 활동적인 고문단과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개혁자들은 대부분이 일본을 목표로 삼고 있었으며, 일본도 전반적으로 그들을 지원했다.
조선사회는 더욱 정부의 지도력과 집단적 응집력이 없어지고 계급과 사회적 경계가 혼란에 빠져있었다. 대원군에 의한 관료세계, 동학당의 대중세계, 독립협회의 지적 노력 등 이들 모두가 1890년대가 끝날 즈음엔 지도자는 물론 응집력 자체를 잃고 있었다.
러일전쟁발발 이후 일본은 상대적으로 개혁적이고,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와 언어가 상대적으로 이질적이지 않고, 유학생 교환에도 적극적이었다. 따라서 일본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위로부터의 행정개혁과 그에 따른 전통적인 사회적 균형의 붕괴는 결국 외국의 점령을 조장하고 말았다.
이러한 시기에 송병준, 손병희, 이용구는 국가의 진보와 개인적 성공을 위해서는 일본과 제휴해야 하며,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손병희와 이용구는 동학당 지도자였는데 손병희는 동학당 내부의 일본지원운동을 촉진하고, 이용구는 그것을 지도했다.
손병준은 일본에서 귀국한 엘리트를 중심으로 좀더 소규모의 지도자집단은 조직하고 일본을 지지한다. 이것이 일진회다.
이로 인해 일본은 조선일반사회에 대화 채널을 가지게 되고 일진회는 일본이 지배하는 조선정부안에 로비채널을 가지게 되었다. 일진회는 정부의 중요포스트에 많은 지지자들을 배치하고 이들을 정치적사회적 동원의 중요한 채널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진회는 조직이 커지자 더욱 적극적 친일을 표방한다.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을 지지하는 대중운동을 벌였으며, 조선국왕(고종)의 퇴위를 요구하는 대중운동으로, 최후에는 조선합병을 직접 지지하는 대중운동으로 까지 발전했다.
일진회의 이러한 행위는 한국 역사상 하나의 정당을 위해 대중적 지지를 동원한 최초의 시도이다. 즉, 한국에서 최초로 성공한 정당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국민운동이었으며, 대중집회, 공개연설, 포스터, 대규모재정원조 및 일반적 국가문제에 관한 압력공작 등 여러 기교를 구사했다
하지만 일진회는 폭력적 하층계급의 방법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절차가 있었다. 그들은“일본의 이익에 해를 끼치는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을 임으로 체포하고, 불법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6인 위원회를 임명하여 법정에 파견하였다. 이후 일진회의 과격주의 때문에 1906년 동학당이 일진회로부터 분리(1905 년 12월 1일에 천도교로 개칭), 이를 계기로 일진회가 점차 세력을 잃었으며, 마침내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일본 자신의 손으로 해산한다.
일진회는 신흥 개발국의 정치적 대중동원에 관한 사례를 보여준다. 일본의 식민지적 야심은, 대중의 중립화는 필요하다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전쟁과 철도 건설은 이런 동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을 조성했고, 종교적 조직은 기성의 조직망을 제공했다. 전통의 붕괴는 낡은 계급이나 가치에 얽매이지 않는 신인들을 해방했다. 이런 신인들은 부동적이며 그들 가운데는 권력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앞잡이와 지도자로 봉사하려고 안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기꺼이 낡은 유교정치의 족쇄를 부수었다.
조선은 더 이상 지배체제를 갖고 있지 않았다. 점차 적응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수단이나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정치적 리더쉽은 정치적 기회를 포착하는 민첩성이 도덕이나 정직성보다도 중요하게 되었다.
대중들은 새로 등장한 정치 조작자들과 마찬가지로 중간조직에 대한 열정과 충성심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정치노선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무소속의 중립적인 일반대중들은 쉽게 이용될 수 있었다.일반대중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보수와 외국의 보호가 대중을 동원하는 주된 설득력이었다.
하지만 일진회가 일순가 사라진 것은 진정한 집단적 충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대중들은 독립이 상실되는 문제의 경우에도 그들 위에 형성된 조직 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용되고, 조종당하였다.
일진회가 일시적으로 성공했다는 것은 일본 지배시대의 도래에 반대하는 대중봉기의 위협을 크게 중화시켰다. 그 후 대중들의 돌연하고 급격한 노출은 시저리즘(전제정치)을 가져왔고, 심지어 독립까지 잃게 되었다.
1890년부터 1901년까지 현대의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한국은 이미 사회적 계층이동 상황에 도달했는데, 한국은 그런 대중사회의 위험한 의외성과 불안정성을 아주 일찍이 경험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