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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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조선통신사

2. 조선통신사의 배경과 목적
2.1 조선의 경우
2.2 일본의 경우

3. 조선통신사의 구성 및 행로
3.1 조선통신사의 구성
3.2 조선통신사의 파견절차와 행로

4. 조선 통신사의 문화교류

5. 일본 체험에서 받은 것들

6. 통신사, 그 이후

<참고 문헌>

본문내용

국이 힘들어 울기까지 했다는 점(1636.11.14)을 말하고 있다.
통신사행이 문화사행과 동일시 된 것은 한일 문사의 창화(唱和)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고 조선 문사에게서 시문을 얻으려는 대상이 일반 민중에게까지 보편화된 이후이다. 양국의 교류가 문사에게 일반민중에게까지 확대되자 일본인들은 조선 사신이 쓴 글씨면 내용 여하를 막론하고 요구했다고 한다. 7,8,9차 사행 때는 특히 전국에서 몰려든 문사들과 일반 서민들에 의한 시문요청이 극대화되기도 한다. 이러한 통신사행 성격의 변모는 사신들이 사행을 떠날 때 가졌던 위험 의식이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 9차의 신유한은 이미 사행을 떠나기 전에 “ 왜인들이 문자를 즐기는 취미가 근래에 더욱 왕성하여 부러워하고, 사모하여 떼지어 따라 다니며.. (중략)그들의 말에 수응하여 우리나라 문화를 선양하는 것을 반드시 제술관에게 책임지우게 되니 일이 번잡하고 책임이 크다.”라는 다짐을 통해 그가 출발 이전에 이미 문화 선양의 사행목표를 확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사신들은 일본을 문화화 시켜서 침략 야욕을 순화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수천 여 수의 시를 쓰는 시달림을 참았다고 한다. 그러나 대체로 이러한 일본 문사들의 시문 요구에 수응하는 일은 함께 동행 했던 제술관이나 삼방서기의 임무였고 대체로 서신이나 창시가 들어왔을 때 그에 답하는 식으로 시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선은 이와 같은 문화적 접촉에 대비하여 특히 시문과 글씨에 뛰어난 문사를 선임했다. 특히 제술관 및 삼 사신 소속의 서기는 일본의 학자를 응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선정할 때 조선국 내를 물색하여 학식이 뛰어나고 한시에 재능이 있는 학자를 선발하였다고 한다. 사행양상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교류의 중심이 주로 서얼로 이뤄진 제술관과 삼방서기로 옮겨 오게 되기도 하고, 이들 외에도 군관, 역관 등이 문사교류에 함께 참여했다는 점은 사행의 성격과 의미에 큰 변모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5. 일본 체험에서 받은 것들
조선 통신사의 사행록에서 드러나는 큰 특징은 사신들의 일본에 대한 관점과 기술 방식의 점진적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초기에는 오랑캐라고 하여 적대시 했고, 중기에는 자신들의 문화적 우월성을 앞세워 교화하려고 하고 과시하려고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일본 문화에서 놀라움을 발견하는 부분이 늘어난다.
첫 번째로 조선의 문사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규격에 맞추는 일본인들의 정밀한 기술이었다. 이것은 1763년 계미사행때 정사 조엄 등의 인물들의 기록에도 나오지만, 그 이전 신유한 같이 일본을 이적시 하는 마음이 컸던 인물도 일본인들이 물품 제작 때 보여준 정밀함과 정확함에 대해 주목한다.
조선의 사신들이 일본에서 받은 가장 큰 충격은 주자학에 대한 도전과 중화주의의 해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17세기말에서 시작되어 18세기 전후반, 일본 문사들이 보여 준 사상적 도전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조선과는 달리 중국과 전혀 관계가 없는 대등한 나라라고 자부하고, 조선을 중국에 예속된 나라라고 강조한다. 중국에 조공하는 왕은 모두 중국의 책봉을 받고 중국의 호를 받는데, 일본은 연호를 세운 이후 대대로 일천년 동안 관계, 복색, 예의, 제도가 탁연히 자립하여 다른 나라의 호와 책봉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자부한다. 이러한 일본 문사들의 시각은 당시 조선의 문사들에게 사상적으로 조선의 민족의식을 검토하게 하는 소중한 계기를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하나는 조선 문사에게 천하가 단지 중국만이 아니고 더 광대한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는 역할도 한다. 당시 조선 문사들은 세계에 대한 지식이 너무 없어서 구라파, 이탈리아, 화란 등의 여러 나라가 어느 곳에 있는지 일본 문사에게 물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일본인들을 통한 세계에 대한 지식의 확대가 곧 바로 조선 사신들의 반응을 불러오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중국 이외의 서양이나 기타 외국의 나라들의 존재를 점진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통로가 되었을 것이며, 중국을 천하의 중심에 놓던 조선 문사들의 사고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6. 통신사, 그 이후
조선통신사는 열두 차례의 사행으로 끝나게 되지만 그 이후 항구가 개방되고 일본과 국교가 재개되면서 조선의 사신들이 일본을 방문하는 기회가 생기고 기행록도 저술된다. 이 시기에는 사행단의 이름도 수신사(修信使),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등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주는 외교사절에서 받는 외교사절로 그 입장이 바뀐다. 해로와 육로를 거쳐 갔던 이전과는 달리 기차를 이용했기에 시간적인 단축이 엄청났고, 일본에서의 활동도 일본인들이 새로 정비한 기관이나 기술을 견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또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이전과 같은 한시 교류는 없었다. 다만 변하지 않은 것은 우리측 사행록에 드러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라고 한다.
<별첨> 조선통신사 행렬 그림
↑ <에도도 병풍-에도시대에 그려진 에도 그림> 중 조선 통신사 행렬부분을 확대한 것↓
↑ 에도에 들어가는 행렬도
<참고 문헌> 사족을 붙이자면, 이원식의 『조선통신사』의 경우는 국한문혼용체라 읽기가 좀 힘든 것 같아요, 박찬기씨와 이혜순씨의 책은 앞의 서론부분을 읽으면 대략적인 개관은 할 수 있어서 좋아요. 그리고 아래 두 논문은 중앙도서관에서 http://www.dbpia.co.kr
에서 검색하시면 찾으실 수 있습니다.
이원식 『조선통신사』(1991 민음사)
박찬기 『조선 통신사와 일본 근세문학』(2001 보고사)
이혜순 『조선 통신사의 문학』(1996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김의환 『조선 통신사의 발자취』 (1985 정음문화사)
손승철 [조선시대 통신사 연구의 회고와 전망]
고바야시 유끼오 [조선통신사와 민중]
*목 차
1. 조선통신사
2. 조선통신사의 배경과 목적
2.1 조선의 경우
2.2 일본의 경우
3. 조선통신사의 구성 및 행로
3.1 조선통신사의 구성
3.2 조선통신사의 파견절차와 행로
4. 조선 통신사의 문화교류
5. 일본 체험에서 받은 것들
6. 통신사, 그 이후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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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7.11
  • 저작시기2006.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8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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