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미국 통에서 친러파·친일파로
2> ‘을사조약’ 체결의 주역
3> 3.1운동이 일어나자 세 차례의 [경고문] 발표
4> 이완용에 대해서
5> 이완용관련 연표
2> ‘을사조약’ 체결의 주역
3> 3.1운동이 일어나자 세 차례의 [경고문] 발표
4> 이완용에 대해서
5> 이완용관련 연표
본문내용
역사의 비극이며 아이러니이다. 매국노가 쓴 독립문 현판은 우리 역사의 고름과 같은 것이다. 성숙한 국민으로서 당장의 아픔을 참고 역사의 고름을 짜내야만 진정으로 자랑스러운 민족사가 창조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완용, 그가 결코 멀쩡한 나라를 팔아먹은 것은 아니다. 독립협회 활동에서 보여주듯이 그는 한 때나마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 했으며 민족의 장래를 두고 깊이 고뇌하기도 했다. 위에 열거한 이하영이나 민병석으로부터는 그러한 고뇌의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망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명성황후나 대원군, 고종이 역사와 민족에 저지른 죄과는 이완용의 그것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무거운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완용은 만고의 매국노다.
그러나 매국노는 이완용 한사람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이완용에 대한 단죄와 함께 이들 망국배와 매국의 모든 책임을 이완용 한 사람에게만 묻는다면, 그것은 또다른 역사의 은폐와 왜곡일 뿐이며 그를 속죄양으로 삼은 대다수 매국노들의 비열한 책임전가라는 평가를 면치 못할 것이다.
5> 이완용관련 연표
1858. 6.7. 경기도 광주 출생
1867.4.20. 예방승지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감
1870.3.6. 양주 조씨 조명익의 딸과 혼인
1882.10.24.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
1886.3.24. 규장각 대교
1886. 9. 육영공원 입학
1887. 5.9. 시강원 겸사서
1887. 7.20. 미국 주재 공사관 참찬관에 임명됨
1887.11.26. 미국 워싱턴 토착 부임
1888.5.8. 병으로 일시 귀국
1888.8.14. 정3품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1888.10 .주미 공사관 참찬관으로 다시 도미
1888.12. 주미 대리공사
1890.10. 주미 대리공사로 2년 근무하고 귀국
1890.10.29. 승정원 우부승지
1891.3.28. 성균관 대사성
1891.5.19. 종2품 가선대부, 시강원 검교사서
1891.5.22. 형조참판
1891.8.6. 승정원 우승지
1892.9.7. 이조참판
1893.6.15. 한성부 좌윤
1893.8.4. 공조참판
1894.11.26. 외부협판
1895.5.10. 학부대신
1895.8.20. 민비 시해 당일 학부대신에서 면직 당하고 미국 공사관에 피신
1895.10.15. 고종을 경복궁에서 빼내려는 춘생문 사건에 가담
1896.2.11. 아관파천당일 외부대신 겸 학부대신 서리, 농상공부대신 서리
1896.7.2. 독립협회 창립총회에서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됨
1897.7.30. 학부대신
1897.9.1. 평안남도 관찰사
1897.12.6. 비서원경
1898.2.27. 독립협회 회장에 선출됨
1898.3.10. 독립협회 회장으로서 만민공동회 개최
1898.3.11. 전라북도 관찰사
1910.8.22. 총리대신이 자격으로 정부전권대리인이 되어, 한일합방(을사늑약) 체결. 이 공으로 일제에 백작 작위를 하사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등극
1919.3.1. 3-1운동을 비난하며 전국에 경고문을 발표
1926 사망
이완용, 그가 결코 멀쩡한 나라를 팔아먹은 것은 아니다. 독립협회 활동에서 보여주듯이 그는 한 때나마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 했으며 민족의 장래를 두고 깊이 고뇌하기도 했다. 위에 열거한 이하영이나 민병석으로부터는 그러한 고뇌의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망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명성황후나 대원군, 고종이 역사와 민족에 저지른 죄과는 이완용의 그것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무거운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완용은 만고의 매국노다.
그러나 매국노는 이완용 한사람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이완용에 대한 단죄와 함께 이들 망국배와 매국의 모든 책임을 이완용 한 사람에게만 묻는다면, 그것은 또다른 역사의 은폐와 왜곡일 뿐이며 그를 속죄양으로 삼은 대다수 매국노들의 비열한 책임전가라는 평가를 면치 못할 것이다.
5> 이완용관련 연표
1858. 6.7. 경기도 광주 출생
1867.4.20. 예방승지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감
1870.3.6. 양주 조씨 조명익의 딸과 혼인
1882.10.24.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
1886.3.24. 규장각 대교
1886. 9. 육영공원 입학
1887. 5.9. 시강원 겸사서
1887. 7.20. 미국 주재 공사관 참찬관에 임명됨
1887.11.26. 미국 워싱턴 토착 부임
1888.5.8. 병으로 일시 귀국
1888.8.14. 정3품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1888.10 .주미 공사관 참찬관으로 다시 도미
1888.12. 주미 대리공사
1890.10. 주미 대리공사로 2년 근무하고 귀국
1890.10.29. 승정원 우부승지
1891.3.28. 성균관 대사성
1891.5.19. 종2품 가선대부, 시강원 검교사서
1891.5.22. 형조참판
1891.8.6. 승정원 우승지
1892.9.7. 이조참판
1893.6.15. 한성부 좌윤
1893.8.4. 공조참판
1894.11.26. 외부협판
1895.5.10. 학부대신
1895.8.20. 민비 시해 당일 학부대신에서 면직 당하고 미국 공사관에 피신
1895.10.15. 고종을 경복궁에서 빼내려는 춘생문 사건에 가담
1896.2.11. 아관파천당일 외부대신 겸 학부대신 서리, 농상공부대신 서리
1896.7.2. 독립협회 창립총회에서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됨
1897.7.30. 학부대신
1897.9.1. 평안남도 관찰사
1897.12.6. 비서원경
1898.2.27. 독립협회 회장에 선출됨
1898.3.10. 독립협회 회장으로서 만민공동회 개최
1898.3.11. 전라북도 관찰사
1910.8.22. 총리대신이 자격으로 정부전권대리인이 되어, 한일합방(을사늑약) 체결. 이 공으로 일제에 백작 작위를 하사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등극
1919.3.1. 3-1운동을 비난하며 전국에 경고문을 발표
1926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