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나제동맹 결성과 정치적 발전
1) 내물왕의 등장과 김씨 세습왕조의 성립
2) 나제동맹의 결성
3)마립간 시대의 정치적 발전
(1)왕권의 강화
(2) 축성사업
2. 정치체제의 정비
1)배경
(1)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생산력의 발전
(2) 사회의 변동
2) 부체제
(1)부
(2) 6부의 기원과 성립
(3) 부의 구조와 기능
(4) 부대표자 회의- 화백
3) 지증왕대
(1) 지증왕의 등장
(2)국호 및 왕호의 개정
(3) 지방제도의 정비
4) 법흥왕대
(1)율령의 반포
(2) 불교의 공인
3. 영토의 확장과 왕권강화
1)영토의 확장
(1) 한강유역의 확보와 백제 고구려와의 항쟁
(2) 가야의 병합
2) 왕권의 강화
(1) 대왕호의 사용과 연호의 제정
(2) 상대등과 관부의 설치
(3) 화랑도
1) 내물왕의 등장과 김씨 세습왕조의 성립
2) 나제동맹의 결성
3)마립간 시대의 정치적 발전
(1)왕권의 강화
(2) 축성사업
2. 정치체제의 정비
1)배경
(1)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생산력의 발전
(2) 사회의 변동
2) 부체제
(1)부
(2) 6부의 기원과 성립
(3) 부의 구조와 기능
(4) 부대표자 회의- 화백
3) 지증왕대
(1) 지증왕의 등장
(2)국호 및 왕호의 개정
(3) 지방제도의 정비
4) 법흥왕대
(1)율령의 반포
(2) 불교의 공인
3. 영토의 확장과 왕권강화
1)영토의 확장
(1) 한강유역의 확보와 백제 고구려와의 항쟁
(2) 가야의 병합
2) 왕권의 강화
(1) 대왕호의 사용과 연호의 제정
(2) 상대등과 관부의 설치
(3) 화랑도
본문내용
와 같이 신라는 지증왕 법흥왕대에 이르러 고대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진흥왕(540~576)에는 정복국가로 발전하고 있었다. 진흥왕대의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한강 상하류의 고구려 영토와 백제가 차지한 한강하류마저 차지하면서 한강유역을 완전히 장악하므로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가야지역까지 완전히 합병하여 지역을 편입하는 영토의 확장을 이루었던 것이다.
(1) 한강유역의 확보와 백제 고구려와의 항쟁
진흥왕이 등장할 무렵의 고구려는 왕실내부의 다툼으로 인해 전반적인 국내정세가 매우 혼미했을 뿐 아니라 민심도 이반하고 있었고, 백제는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며 국정쇄신과 도약을 발판을 마련하며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의 땅을 회복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무렵 등장한 신라의 진흥왕은 대외정복사업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진흥왕 11년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놓고 공방을 벌이는 동안 신라가 이 둘을 모두 차지하였고 , 진흥왕 12년 신라와 백제는 한강유역의 공격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때 신라는 백제의 동북지역을 공격해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신라와 백제의 대립이 본격화 되는데 나제동맹은 결렬되고 백제의 성왕도 살해되었다. 새로이 차지한 한강유역을 통치하기 위해 신라는 이 지역에 신주를 설치하고 <북한산비>를 세웠다.
(2) 가야의 병합
6세기에 들어오면 가야를 둘러싼 국제 관계가 크게 변하였다. 한강 유역을 잃은 백제는 가야에 대해 강한 야욕을 품어 왜를 끓어 들이게 되는 움직임이 신라를 자극해서 격렬한 국제관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백제의 적극적 진출에 대해 가야 여러 나라의 맹주인 대가야가 반발하여 신라와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 후 신라의 법흥왕의 남진정책으로 영토를 개척하였다. 가야의 동남부 지역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킨 신라는 법흥왕 19년에 드디어 김해의 금관가야를 병합하게 되었다. 이때 신라는 투항한 금관국의 지배계층을 상당히 우대하는 조처를 취한 듯하다. 어쨌든 본가야의 멸망으로 가야 여러 나라에게 타격을 주었고 신라는 가야정복에 매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였다. 진흥왕 22년에 비로소 나머지 여러 가야들도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이렇게 가야 여러 나라들은 신라에 병합되었으나 그 문화와 인물은 신라에 흡수되어 신라문화의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가야의 악기인 가야금이 신라에 전해져 신라의 궁중음악으로 채택되고 본가야 왕족의 후예들이 신라의 진골귀족이 되어 영토확장과 삼국통일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특히 본가야 마지막왕인 구해의 아들에서 김무력에서 김유신까지 3대에 걸쳐 신라의 중요한 전투에서 커다란 공을 세워 삼국통일의 결정적 기회를 제공하였다.
2) 왕권의 강화
(1) 대왕호의 사용과 연호의 제정
신라의 왕이 부를 초월하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은 법흥왕대부터였다. 왕은 이전의 부의 대표자로서의 매금왕에서 부를 초월하여 신라라는 국가를 대표하는 태왕(대왕)으로서 지위가 격상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아마도 연호의 사용이나 불교의 공인과 같은 정치적 변동이 깊숙이 관련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법흥왕 23년 연호의 사용이라는 중국의 호아제를 모방하여 천하의 왕임을 선포한 시점에서 신라의 왕은 부를 초월한 존재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흥왕 6년(545)에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한 것도 이러한 왕권의 강화와 관련 있는 일이라 하겠으니 왕실 중심의 새로운 역사가 이때에 정비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왕호의 변경과 연호의 사용은 단순한 명칭상의 변경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그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신라왕실의 권위를 과시한 것이라 하겠다.
(2) 상대등과 관부의 설치
지난날 왕이 수행하던 화백회의의 의장의 역할을 대신할 직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상대등이라는 관직의 창설이다. 법흥왕 18년(531)에 설치된 상대등의 기능은 귀족회의인 대등회의의 주재자로 귀족과 왕 사이에서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가졌다. 또 상대등은 왕의 교체와 거취를 같이한다는 점에서는 왕의 권력과 권위를 서로 보완하는 존재만. 스스로 귀족의 통솔자이며 대표자라는 점에서는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갖기도 한 독특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또 정당한 왕위 계승자가 없을 경우에는 왕위를 계승할 제일 후보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또한 정무를 담당한 중앙관부의 설치는 상대적으로 왕권의 강화를 가져왔다. 법흥왕3년에 병부의 설치를 시작으로 점차 여러 관부가 분화 증치되었다. 또 진평왕때에는 내성을 설치하여 정식기구화 하였는데 내성은 왕실의 재산관리와 왕명의 출납 등이 그 중요한 기능이었는데. 이 내성의 권한은 중대 이후에 급격히 확장되어 병부 사정부와 함께 권력의 핵심기관이 되었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근시기구가 진평왕대에 설립되었다는 것은 바로 보다 강력한 왕권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3) 화랑도
진흥왕대에 제도화된 화랑도도 신라가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다. 화랑도의 기원은 원시 시대 이래의 연령집단조직이라 생각되는데. 연령집단이란 일정한 나이또래의 청소년들로 구성되어지며 청소년들은 이를 통해 단테생활과 공동의 의식을 수행하며 그 사회의 전통적 가치와 질서를 체득하고 동일한 이상을 추구하며 가무와 무예를 익혀 서로간의 이해와 우의를 맺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신라가 대내외적인 팽창을 하는 가운데 정복전쟁의 수행을 위해 많은 병사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기준의 청소년 조직의 개편이 요청되었다. 화랑도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군대의 보충을 제1차적 목적으로 하였으나 보다 큰 목적은 인재의 양성과 확보에 있다. 또 이 화랑도의 정신적 기반으로 불교가 채택되었음을 알 수 있고 화랑도의 수령인화랑은 도솔천에서 하생한 미륵으로 여겨졌다. 조직 자체는 어디까지나 현실과 왕권과 권력기구를 옹호하는 단체였다. 이는 화랑도가 지켜야할 계율인 원광의 세속오계에도 잘 나타나 있다. 화랑도의 설치는 정치적인 면에서 중앙집권화 즉 왕권강화와 연결되어 전개되었던 것이다.
(1) 한강유역의 확보와 백제 고구려와의 항쟁
진흥왕이 등장할 무렵의 고구려는 왕실내부의 다툼으로 인해 전반적인 국내정세가 매우 혼미했을 뿐 아니라 민심도 이반하고 있었고, 백제는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며 국정쇄신과 도약을 발판을 마련하며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의 땅을 회복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무렵 등장한 신라의 진흥왕은 대외정복사업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진흥왕 11년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놓고 공방을 벌이는 동안 신라가 이 둘을 모두 차지하였고 , 진흥왕 12년 신라와 백제는 한강유역의 공격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때 신라는 백제의 동북지역을 공격해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신라와 백제의 대립이 본격화 되는데 나제동맹은 결렬되고 백제의 성왕도 살해되었다. 새로이 차지한 한강유역을 통치하기 위해 신라는 이 지역에 신주를 설치하고 <북한산비>를 세웠다.
(2) 가야의 병합
6세기에 들어오면 가야를 둘러싼 국제 관계가 크게 변하였다. 한강 유역을 잃은 백제는 가야에 대해 강한 야욕을 품어 왜를 끓어 들이게 되는 움직임이 신라를 자극해서 격렬한 국제관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백제의 적극적 진출에 대해 가야 여러 나라의 맹주인 대가야가 반발하여 신라와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 후 신라의 법흥왕의 남진정책으로 영토를 개척하였다. 가야의 동남부 지역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킨 신라는 법흥왕 19년에 드디어 김해의 금관가야를 병합하게 되었다. 이때 신라는 투항한 금관국의 지배계층을 상당히 우대하는 조처를 취한 듯하다. 어쨌든 본가야의 멸망으로 가야 여러 나라에게 타격을 주었고 신라는 가야정복에 매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였다. 진흥왕 22년에 비로소 나머지 여러 가야들도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이렇게 가야 여러 나라들은 신라에 병합되었으나 그 문화와 인물은 신라에 흡수되어 신라문화의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가야의 악기인 가야금이 신라에 전해져 신라의 궁중음악으로 채택되고 본가야 왕족의 후예들이 신라의 진골귀족이 되어 영토확장과 삼국통일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특히 본가야 마지막왕인 구해의 아들에서 김무력에서 김유신까지 3대에 걸쳐 신라의 중요한 전투에서 커다란 공을 세워 삼국통일의 결정적 기회를 제공하였다.
2) 왕권의 강화
(1) 대왕호의 사용과 연호의 제정
신라의 왕이 부를 초월하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은 법흥왕대부터였다. 왕은 이전의 부의 대표자로서의 매금왕에서 부를 초월하여 신라라는 국가를 대표하는 태왕(대왕)으로서 지위가 격상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아마도 연호의 사용이나 불교의 공인과 같은 정치적 변동이 깊숙이 관련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법흥왕 23년 연호의 사용이라는 중국의 호아제를 모방하여 천하의 왕임을 선포한 시점에서 신라의 왕은 부를 초월한 존재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흥왕 6년(545)에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한 것도 이러한 왕권의 강화와 관련 있는 일이라 하겠으니 왕실 중심의 새로운 역사가 이때에 정비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왕호의 변경과 연호의 사용은 단순한 명칭상의 변경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그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신라왕실의 권위를 과시한 것이라 하겠다.
(2) 상대등과 관부의 설치
지난날 왕이 수행하던 화백회의의 의장의 역할을 대신할 직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상대등이라는 관직의 창설이다. 법흥왕 18년(531)에 설치된 상대등의 기능은 귀족회의인 대등회의의 주재자로 귀족과 왕 사이에서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가졌다. 또 상대등은 왕의 교체와 거취를 같이한다는 점에서는 왕의 권력과 권위를 서로 보완하는 존재만. 스스로 귀족의 통솔자이며 대표자라는 점에서는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갖기도 한 독특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또 정당한 왕위 계승자가 없을 경우에는 왕위를 계승할 제일 후보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또한 정무를 담당한 중앙관부의 설치는 상대적으로 왕권의 강화를 가져왔다. 법흥왕3년에 병부의 설치를 시작으로 점차 여러 관부가 분화 증치되었다. 또 진평왕때에는 내성을 설치하여 정식기구화 하였는데 내성은 왕실의 재산관리와 왕명의 출납 등이 그 중요한 기능이었는데. 이 내성의 권한은 중대 이후에 급격히 확장되어 병부 사정부와 함께 권력의 핵심기관이 되었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근시기구가 진평왕대에 설립되었다는 것은 바로 보다 강력한 왕권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3) 화랑도
진흥왕대에 제도화된 화랑도도 신라가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다. 화랑도의 기원은 원시 시대 이래의 연령집단조직이라 생각되는데. 연령집단이란 일정한 나이또래의 청소년들로 구성되어지며 청소년들은 이를 통해 단테생활과 공동의 의식을 수행하며 그 사회의 전통적 가치와 질서를 체득하고 동일한 이상을 추구하며 가무와 무예를 익혀 서로간의 이해와 우의를 맺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신라가 대내외적인 팽창을 하는 가운데 정복전쟁의 수행을 위해 많은 병사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기준의 청소년 조직의 개편이 요청되었다. 화랑도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군대의 보충을 제1차적 목적으로 하였으나 보다 큰 목적은 인재의 양성과 확보에 있다. 또 이 화랑도의 정신적 기반으로 불교가 채택되었음을 알 수 있고 화랑도의 수령인화랑은 도솔천에서 하생한 미륵으로 여겨졌다. 조직 자체는 어디까지나 현실과 왕권과 권력기구를 옹호하는 단체였다. 이는 화랑도가 지켜야할 계율인 원광의 세속오계에도 잘 나타나 있다. 화랑도의 설치는 정치적인 면에서 중앙집권화 즉 왕권강화와 연결되어 전개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