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는말
2. 문헌상에 나타난 한성 백제
3. 고고학으로 본 한성 백제.
4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5 나오는 말
2. 문헌상에 나타난 한성 백제
3. 고고학으로 본 한성 백제.
4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5 나오는 말
본문내용
려 성벽을 쌓았다. 그리고 서북쪽에 남무 토막들을 박고 일렬로 역어 만든 외적 방어 시실인 목책이 있었음이 확인됐으며, 바깥쪽에서는 뻘층이 나와 해자가 있었음이 드러났다. 유물 중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중국 서진(AD 265~316)제로 판단되는 흑갈색 전문도자(錢文陶磁)인데 이는 몽촌토성이 만들어진 시대를 3세기 중후반 때쯤으로 끌어 올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 연꽃 무늬를 새긴 막새기와와 동물벼 비늘갑옷도 출토됐다. 그리고 적심석을 갖추고 있는 지상건물, 와당으로 장식된 기와, 그리고 塼, 지당과 같은 조경시설, 망대나 군사용 건물로 대표되는 방수시설 등의 존재는 앞에서 살펴본 중국청자 및 금동과대금구 등의 위신재와 더불어 이곳이 왕성임을 시사하는 고고학 자료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박순발, 2001,『한성백제의 정설』, pp.187~202.
하지만 몽촌토성 역시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왕성으로 보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고이왕 30년조의 “왕궁에서 난 불이 민가로 옮겨 붙었다”는 기록을 보아 위례성 안에는 왕궁이 있었고 민가는 왕궁에서 아주 가깝게 있었음이 확실하다 하겠다. 위 『삼국사기』기록만 보더라도 왕궁에 민가가 있었지만 몽촌토성에는 아직 풍납토성만큼의 확실한 민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또한 몽촌토성을 왕성으로 인정할 경우 원사료인 『삼국사기』의 초기기록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삼국사기에 기록된 북성은 풍납토성이고 몽촌토성이 남성이지만 이 두 개의 성은 하나는 왕성으로서의 구실만, 다른 하나는 단순한 거주지 및 군사기지로서의 구실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성 모두가 상황에 따라 왕성과 군사적 기지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시 한강 범람에 대한 우려와 고구려에 대한 위협에 대한 대처를 위해서라도 두 개의 성이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비록 몽촌토성도 범람에 대한 저지대 침수는 있었겠지만 풍납토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수에 안전했을 것이고 고구려 군에 대한 대비로도 안전성이 더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의 왕성을 하나로 보는 것보다 융통성을 넓혀 큰 의미로 보았다.
◆ 마치면서.
이번 발제문을 통해 그동안 잊고 살았던 한성기 백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다. 한성기 백제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본 발제자의 무지와 무관심에 부끄러움을 갖게 되었고 내 뿌리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발제문을 써가면서 본 발제자는 많은 선택을 했어야 했다. 처음 『삼국사기』초기 기록의 진위성 여부부터 시작해서, ‘하북위례성’의 인정 여부, 하남위례성과 한성을 동일시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 하남위례성에 대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중 어디를 진정한 왕성으로 봐야 하는가에 대한 여부 등 많은 선택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였던 진정한 왕성을 어디로 둘 것인가에 대해 처음에는 풍납토성으로 잡았다. 왜냐하면 풍납토성에 대한 인정은 곧 『삼국사기』초기 기록에 대한 진정성 여부와 관련이 되는 것이고, 백제의 ‘국가’체제가 더 이른 시기에 확립된 걸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풍납토성을 인정하기에는 문제점이 존재하고 더 많은 고고학적 조사와 문헌적 연구가 더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하에 판단을 유보하고 더 큰 의미의 왕성체제로 마쳐야만 했다. 마치고 나서 개운한 마음보다 백제의 진정한 왕성에 대한 약간의 찝찝함은 있지만 조만간에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연구가 나오길 바라면서 본 발제문을 마치고자 한다.
하지만 몽촌토성 역시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왕성으로 보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고이왕 30년조의 “왕궁에서 난 불이 민가로 옮겨 붙었다”는 기록을 보아 위례성 안에는 왕궁이 있었고 민가는 왕궁에서 아주 가깝게 있었음이 확실하다 하겠다. 위 『삼국사기』기록만 보더라도 왕궁에 민가가 있었지만 몽촌토성에는 아직 풍납토성만큼의 확실한 민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또한 몽촌토성을 왕성으로 인정할 경우 원사료인 『삼국사기』의 초기기록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삼국사기에 기록된 북성은 풍납토성이고 몽촌토성이 남성이지만 이 두 개의 성은 하나는 왕성으로서의 구실만, 다른 하나는 단순한 거주지 및 군사기지로서의 구실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성 모두가 상황에 따라 왕성과 군사적 기지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시 한강 범람에 대한 우려와 고구려에 대한 위협에 대한 대처를 위해서라도 두 개의 성이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비록 몽촌토성도 범람에 대한 저지대 침수는 있었겠지만 풍납토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수에 안전했을 것이고 고구려 군에 대한 대비로도 안전성이 더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의 왕성을 하나로 보는 것보다 융통성을 넓혀 큰 의미로 보았다.
◆ 마치면서.
이번 발제문을 통해 그동안 잊고 살았던 한성기 백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다. 한성기 백제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본 발제자의 무지와 무관심에 부끄러움을 갖게 되었고 내 뿌리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발제문을 써가면서 본 발제자는 많은 선택을 했어야 했다. 처음 『삼국사기』초기 기록의 진위성 여부부터 시작해서, ‘하북위례성’의 인정 여부, 하남위례성과 한성을 동일시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 하남위례성에 대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중 어디를 진정한 왕성으로 봐야 하는가에 대한 여부 등 많은 선택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였던 진정한 왕성을 어디로 둘 것인가에 대해 처음에는 풍납토성으로 잡았다. 왜냐하면 풍납토성에 대한 인정은 곧 『삼국사기』초기 기록에 대한 진정성 여부와 관련이 되는 것이고, 백제의 ‘국가’체제가 더 이른 시기에 확립된 걸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풍납토성을 인정하기에는 문제점이 존재하고 더 많은 고고학적 조사와 문헌적 연구가 더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하에 판단을 유보하고 더 큰 의미의 왕성체제로 마쳐야만 했다. 마치고 나서 개운한 마음보다 백제의 진정한 왕성에 대한 약간의 찝찝함은 있지만 조만간에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연구가 나오길 바라면서 본 발제문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