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답사를 계획하며...
2. 은적사 석가여래 삼존상
3. 옥구향교 대성전, 자천대
4. 임피향교 대성전, 노성당
5. 상주사 대웅전
6. 옥구 발산리 석등, 발산리 오층 석탑
7. 충의사
8. 탑동삼층석탑
9. 답사를 마치며...
2. 은적사 석가여래 삼존상
3. 옥구향교 대성전, 자천대
4. 임피향교 대성전, 노성당
5. 상주사 대웅전
6. 옥구 발산리 석등, 발산리 오층 석탑
7. 충의사
8. 탑동삼층석탑
9. 답사를 마치며...
본문내용
처럼 잘 보관을 해서 충분한 교육적 자료로 사용을 했으면 좋겠다.
7. 충의사
충의사는 일명 ‘최호장군 사당‘으로 최호장군은 선조 7년(157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에 역임하였고 선조 29년(1596년)에 충청도 수군절도사 재임중에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또한 정유재란(1597년)중 칠천해전에서 분전하다 순절한 군산시 발산에서 태어난 유명한 장군이다. 이분의 사당에 도착해서 입구에 들어갔는데 어느새 시간이 지나 저녁 5시가 넘어버리는 바람에 최호장군의 삼인보검과 교지를 전시하고 있는 유물전시관이 문을 닫고 말았다. 유물전시관이 문을 닫는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결국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유물전시관의 입구문이 유리문이라 유리문을 통해 최호장군의 영정과 몇가지 교지, 그리고 신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신발은 아무래도 최호장군이 전쟁시 신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유물전시관은 포기하고 사당을 보러 갔는데, 사당 또한 지금 보수공사 중이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결국 충의사에서는 거의 본 것이 없는 것 같다. 다만 사당의 오른편에 최호장군의 묘지가 있어 그 묘만 한번 둘러보고 다시 나올 수밖에 없었다.
8. 탑동삼층석탑
원래대로라면 모든 여로가 끝난 답사였다. 몸도 매우 피곤한 상태여서 이젠 그만 집에 가고 싶었는데, 지도를 보는 도중에 유형문화재 66호로 지정되어 있는 탑동삼층석탑을 한번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다시 탑동마을로 달려가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는 탑동마을이 어딘지 모르는 바람에 헤맬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탑동을 발견할 수가 없어서 그만 포기를 하려고 했는데, 우연히 차를 돌렸던 곳에 탑동마을을 가리키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대야를 넘어 전주를 가는 길 사이에서 왼쪽으로 꺾는 곳에 있었다. 기쁜 나머지 마지막 답사장소라고 생각하고 탑동마을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한 어린아이에게 물어보고 석탑이 있는 장소를 알 수 있었다. 집과 집 사이에 나있는 길을 따라 한 5분 정도를 걸으니 사찰이 하나 보였고, 바로 그 왼쪽에 우리가 찾고 있었던 탑동삼층석탑이 서 있었다. 이 탑은 비록 삼층이지만 크기와 높이가 발산리 오층석탑보다 더 큰 느낌이 들었다. 이 석탑은 백제 정림사지 5층석탑의 양식을 일부 모방한 고려탑이라고 한다 백제 정림사지 5층 석탑과 가장 비슷한 것은 색깔이다. 수업시간 슬라이드를 통해 본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상당히 검었는데, 이 석탑도 마찬가지다. 마치 불속에서 오랫동안 탄 것처럼 상당히 검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 단층기단에 3층의 탑신을 조성하였는데, 탑신과 옥개석이 모두 별석(別石)으로 조성된 탑이다. 얇고 넓은 옥개석의 네귀는 발산리 석탑과 마찬가지로 끝이 약간 들려있다. 이 탑은 높이가 5.5미터인데, 넓은 옥개석과 마치 불에 탄 것처럼 색깔이 상당히 검어서 높은 안정감을 주었다. 고려탑이어서 그런지 역시 크고 웅장했으며, 거친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사진 촬영을 하고 마감을 하려고 했는데, 불행하게도 사진 필름이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충격이었다. 힘들게 도착한 만큼 기분 좋게 가려고 했는데, 조금은 아쉬웠다.
9. 답사를 마치며...
탑동삼층석탑을 마지막으로 답사를 마쳤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계속 차를 타고 다니느라 몸이 약간 피곤하긴 했지만, 내가 태어난 지방의 많은 문화재와 유적지를 직접 찾아가 보고 느꼈다는 점에서는 평생 할 수 없을 경험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것이 추석을 이틀 앞두고 시행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나름대로 있는 것 같다. 은적사에서 탑동까지의 답사.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 앞으로도 계속 기억 속에 남을 답사여행이었을 것이다.
답사를 하면서 아쉬웠던 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문화재가 있는 곳에 그 문화재를 설명해주는 전문가가 없다는 것, 그리고 문화재 보관상의 문제가 여전히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문화재를 관람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의식이 많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들을 잘 수선하고 보존하고 문화재에 대한 전문 인력을 더욱 확충한다면 세계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문화관광강국이 되리라 확신한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니 금새 힘이 솟았다. 답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데, 이틀 전 개통된 서해안 고속도로로 인해서, 그리고 추석 고향방문객으로 인해서 집으로 가는 도로가 차량으로 매우 붐벼 거북이걸음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오늘 내가 얻은 수확에 비하면 충분히 포기할 수 있는 비용이 아닐까?
7. 충의사
충의사는 일명 ‘최호장군 사당‘으로 최호장군은 선조 7년(157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에 역임하였고 선조 29년(1596년)에 충청도 수군절도사 재임중에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또한 정유재란(1597년)중 칠천해전에서 분전하다 순절한 군산시 발산에서 태어난 유명한 장군이다. 이분의 사당에 도착해서 입구에 들어갔는데 어느새 시간이 지나 저녁 5시가 넘어버리는 바람에 최호장군의 삼인보검과 교지를 전시하고 있는 유물전시관이 문을 닫고 말았다. 유물전시관이 문을 닫는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결국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유물전시관의 입구문이 유리문이라 유리문을 통해 최호장군의 영정과 몇가지 교지, 그리고 신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신발은 아무래도 최호장군이 전쟁시 신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유물전시관은 포기하고 사당을 보러 갔는데, 사당 또한 지금 보수공사 중이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결국 충의사에서는 거의 본 것이 없는 것 같다. 다만 사당의 오른편에 최호장군의 묘지가 있어 그 묘만 한번 둘러보고 다시 나올 수밖에 없었다.
8. 탑동삼층석탑
원래대로라면 모든 여로가 끝난 답사였다. 몸도 매우 피곤한 상태여서 이젠 그만 집에 가고 싶었는데, 지도를 보는 도중에 유형문화재 66호로 지정되어 있는 탑동삼층석탑을 한번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다시 탑동마을로 달려가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는 탑동마을이 어딘지 모르는 바람에 헤맬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탑동을 발견할 수가 없어서 그만 포기를 하려고 했는데, 우연히 차를 돌렸던 곳에 탑동마을을 가리키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대야를 넘어 전주를 가는 길 사이에서 왼쪽으로 꺾는 곳에 있었다. 기쁜 나머지 마지막 답사장소라고 생각하고 탑동마을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한 어린아이에게 물어보고 석탑이 있는 장소를 알 수 있었다. 집과 집 사이에 나있는 길을 따라 한 5분 정도를 걸으니 사찰이 하나 보였고, 바로 그 왼쪽에 우리가 찾고 있었던 탑동삼층석탑이 서 있었다. 이 탑은 비록 삼층이지만 크기와 높이가 발산리 오층석탑보다 더 큰 느낌이 들었다. 이 석탑은 백제 정림사지 5층석탑의 양식을 일부 모방한 고려탑이라고 한다 백제 정림사지 5층 석탑과 가장 비슷한 것은 색깔이다. 수업시간 슬라이드를 통해 본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상당히 검었는데, 이 석탑도 마찬가지다. 마치 불속에서 오랫동안 탄 것처럼 상당히 검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 단층기단에 3층의 탑신을 조성하였는데, 탑신과 옥개석이 모두 별석(別石)으로 조성된 탑이다. 얇고 넓은 옥개석의 네귀는 발산리 석탑과 마찬가지로 끝이 약간 들려있다. 이 탑은 높이가 5.5미터인데, 넓은 옥개석과 마치 불에 탄 것처럼 색깔이 상당히 검어서 높은 안정감을 주었다. 고려탑이어서 그런지 역시 크고 웅장했으며, 거친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사진 촬영을 하고 마감을 하려고 했는데, 불행하게도 사진 필름이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충격이었다. 힘들게 도착한 만큼 기분 좋게 가려고 했는데, 조금은 아쉬웠다.
9. 답사를 마치며...
탑동삼층석탑을 마지막으로 답사를 마쳤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계속 차를 타고 다니느라 몸이 약간 피곤하긴 했지만, 내가 태어난 지방의 많은 문화재와 유적지를 직접 찾아가 보고 느꼈다는 점에서는 평생 할 수 없을 경험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것이 추석을 이틀 앞두고 시행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나름대로 있는 것 같다. 은적사에서 탑동까지의 답사.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 앞으로도 계속 기억 속에 남을 답사여행이었을 것이다.
답사를 하면서 아쉬웠던 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문화재가 있는 곳에 그 문화재를 설명해주는 전문가가 없다는 것, 그리고 문화재 보관상의 문제가 여전히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문화재를 관람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의식이 많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들을 잘 수선하고 보존하고 문화재에 대한 전문 인력을 더욱 확충한다면 세계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문화관광강국이 되리라 확신한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니 금새 힘이 솟았다. 답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데, 이틀 전 개통된 서해안 고속도로로 인해서, 그리고 추석 고향방문객으로 인해서 집으로 가는 도로가 차량으로 매우 붐벼 거북이걸음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오늘 내가 얻은 수확에 비하면 충분히 포기할 수 있는 비용이 아닐까?
추천자료
새만금 간척의 환경문제
인간과 환경(=>위 주제를 새만금 간척사업을 토대로 연결)
새만금 간척사업 - 친환경적 개발을 위한 과제
직업훈련교사와 일반교사의 차이점
[새만금 간척사업]새만금 간척사업 현황과 주요 쟁점 및 새만금 간척사업에 관한 나의 생각(...
새만금 간척사업과 시민참여
한부모 가족에 대한 편견
새만금간척사업 논란에 대한 찬반론 및 향후대안
전국 명품 투자 10계명
대중국 국제항로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전국우수시장박람회 및 전통시장 활성화 방안
지역사회개발의 개념을 정리하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역사회개발 사례(새만금사업)를 소개.
미륵사지(彌勒寺址) 문화재 배경조사 (백제의 꿈, 미륵사 창건 설화, 미륵사 창건배경, 미륵...
'미완의 기록 새만금사업과 어민들'을 읽고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