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실천적 교육자 이승훈의 삶과 철학
2. 이승훈의 교육사상
3. 교육사적 의의
2. 이승훈의 교육사상
3. 교육사적 의의
본문내용
방에서도 청소를 잘하는 사람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시종일관 지성인이요, 나라와 민족과 교육을 위한 기능적인 사랑의 화신이며 구원의 청년으로 쉬임없이 향상하고 끊임없이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여 교·애·성(敎·愛·誠)을 실천한 구현자이다.
세째, 남강은 교회 학교 산업을 공동 전선으로 파악하고 서로 유기적인 교호작용에 힘썼다. 그는 교회 민중의 무지를 깨치고, 학교에 교육을 일으키고, 산업으로 나라를 근대화하는데 그의 최후의 목적이 있었다. 오산은 남강이 이끄는 교회와 학교와 협동조합을 통하여 완전한 큰 가정을 이루었다. 오산에 사는 주민들은 그를 우리 선생이라고 부르고, 학생들을 우리 학생이라고 불렀다. 학생들은 옆집 어린애들을 목마로 태우거나 손목을 잡고 다녔고, 목욕탕에서는 젊은이가 노인의 등을 밀어 드렸다. 오산을 다닌 학생이나 거기 살던 사람들은 아직도 북쪽 제석산(帝釋山) 밑에 벌어졌던 이 아름다운 이상향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네째로, 그는 굳은 신앙을 다졌다. 1915년에서 1919년까지가 남강의 신앙이 가장 불타오른 기간이었다. 그는 1916년 가을에 장로에 장립되었는데 오산학교를 세울 때처럼 그는 교회에 전심 전력을 다했다. 3·1운동으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온 때의 일이었는데, 볼일로 안악에 나갔다가 김선량(金善亮)을 만나 춘원이 병으로 연등사(燃燈寺)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같이 가기로 하였다. 마침 장마 때였는데 연등사에 가서 춘원을 만나고 걸어서 돌아오면서 이렇게 물었다.
자네, 춘원이 왜 폐를 앓는지 아나? 죄가 있어 않는 거야. 죄값은 꼭 받게 되거든. 춘원이 앓는 것은 연애 소설을 많이 쓴 죄야. 그 좋은 재주를 가지고 나라에 유익한 글은 쓰지 않고. 내가 감옥에 간 것도 남들은 애국운동으로 갔다고 하나, 그런게 아니고 죄값이야. 젊어서 처녀들을 버려주었거든. 그 죄로 감옥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고 감옥에서 나오니 어떻게 마음이 시원한지 몰라. 춘원도 죄 때문이야.
1919년 3·1 운동으로 감옥에 붙잡혀 들어가 한 때 사형설까지 전하다가 명치정부(明治政府)의 정책전환으로 보안법 위반으로 다스려서 3년형을 받고 1922년 7월 경성 감옥에서 나왔다. 감옥에 있으면서 남강의 신앙은 한층 더 두터워졌다. 그는 감옥에서 구약을 20번이나 읽었는데, 그 중에서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신명기,시편,이사야,예레미야등의 여러 편들이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가 항상 위로를 받은 성구는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 까지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남강은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이 구절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는 이 구절의 뜻을 자세히 알 길이 없었으나 주에게 돌아가기만 하면 크나큰 위로를 얻을 것만 같았다. 그는 지금까지 힘에 부치는 짐을 졌는데, 주에게 나감으로 하여 더 무거운 짐도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느꼈다. 교육의 신앙화야말로 참으로 값진 보물이 아니겠는가.
한국교육사에 있어서 남강의 공적은 이상 든 네 가지 중에서 민족과 서민을 발견하고 그 밑에 깊은 체험적 신앙을 다진데 있다고 하겠다. 그가 인간을 위하여 서민과 민족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쳤던 것을 아주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는 학생과 서민과 함께 호흡하면서 우리들이 민족성을 개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페스탈로치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계층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리는 일이 중요하고 이를 위하여 국민교육에 그의 전 생애와 재산과 나중에는 유해마저 그가 지닌 모든 것을 바쳤던 것이다.
세째, 남강은 교회 학교 산업을 공동 전선으로 파악하고 서로 유기적인 교호작용에 힘썼다. 그는 교회 민중의 무지를 깨치고, 학교에 교육을 일으키고, 산업으로 나라를 근대화하는데 그의 최후의 목적이 있었다. 오산은 남강이 이끄는 교회와 학교와 협동조합을 통하여 완전한 큰 가정을 이루었다. 오산에 사는 주민들은 그를 우리 선생이라고 부르고, 학생들을 우리 학생이라고 불렀다. 학생들은 옆집 어린애들을 목마로 태우거나 손목을 잡고 다녔고, 목욕탕에서는 젊은이가 노인의 등을 밀어 드렸다. 오산을 다닌 학생이나 거기 살던 사람들은 아직도 북쪽 제석산(帝釋山) 밑에 벌어졌던 이 아름다운 이상향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네째로, 그는 굳은 신앙을 다졌다. 1915년에서 1919년까지가 남강의 신앙이 가장 불타오른 기간이었다. 그는 1916년 가을에 장로에 장립되었는데 오산학교를 세울 때처럼 그는 교회에 전심 전력을 다했다. 3·1운동으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온 때의 일이었는데, 볼일로 안악에 나갔다가 김선량(金善亮)을 만나 춘원이 병으로 연등사(燃燈寺)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같이 가기로 하였다. 마침 장마 때였는데 연등사에 가서 춘원을 만나고 걸어서 돌아오면서 이렇게 물었다.
자네, 춘원이 왜 폐를 앓는지 아나? 죄가 있어 않는 거야. 죄값은 꼭 받게 되거든. 춘원이 앓는 것은 연애 소설을 많이 쓴 죄야. 그 좋은 재주를 가지고 나라에 유익한 글은 쓰지 않고. 내가 감옥에 간 것도 남들은 애국운동으로 갔다고 하나, 그런게 아니고 죄값이야. 젊어서 처녀들을 버려주었거든. 그 죄로 감옥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고 감옥에서 나오니 어떻게 마음이 시원한지 몰라. 춘원도 죄 때문이야.
1919년 3·1 운동으로 감옥에 붙잡혀 들어가 한 때 사형설까지 전하다가 명치정부(明治政府)의 정책전환으로 보안법 위반으로 다스려서 3년형을 받고 1922년 7월 경성 감옥에서 나왔다. 감옥에 있으면서 남강의 신앙은 한층 더 두터워졌다. 그는 감옥에서 구약을 20번이나 읽었는데, 그 중에서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신명기,시편,이사야,예레미야등의 여러 편들이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가 항상 위로를 받은 성구는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 까지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남강은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이 구절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는 이 구절의 뜻을 자세히 알 길이 없었으나 주에게 돌아가기만 하면 크나큰 위로를 얻을 것만 같았다. 그는 지금까지 힘에 부치는 짐을 졌는데, 주에게 나감으로 하여 더 무거운 짐도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느꼈다. 교육의 신앙화야말로 참으로 값진 보물이 아니겠는가.
한국교육사에 있어서 남강의 공적은 이상 든 네 가지 중에서 민족과 서민을 발견하고 그 밑에 깊은 체험적 신앙을 다진데 있다고 하겠다. 그가 인간을 위하여 서민과 민족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쳤던 것을 아주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는 학생과 서민과 함께 호흡하면서 우리들이 민족성을 개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페스탈로치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계층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리는 일이 중요하고 이를 위하여 국민교육에 그의 전 생애와 재산과 나중에는 유해마저 그가 지닌 모든 것을 바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