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시대의 우리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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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기쁨에서 작곡한 교성곡 ‘조국’, ‘독립축전곡’, 칸타타‘한강’등과 ‘한글날’, ‘3.1절’, ‘개천절’ ‘무궁화노래’등이 있다. 그 이전에 작곡된 곡들이 주로 서정적이면서 토속성이 강한 경향을 보였다면 해방 이후에 작곡된 곡들은 해방된 국민을 계몽하고 조국건설을 기리는 곡들이 주류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일제 말기에 판소리 <춘향가> 의 일부와 민요들을 채보하여 두었는데 이것이 나중의 민요 편곡 등의 바탕이 되었다. 또한 전통음악 발굴에도 심혈을 기울여 ‘서울아리랑’을 비롯하여 ‘진도아리랑’ ‘도라지 타령’ ‘흥타령’등 많은 우리 민요를 합창곡으로 편곡했다.
채동선은 한국 전쟁 중 부산에 피난 내려가 막노동을 하다가 53세에 늑막염을 얻어 생을 마감한다. 당시 한국의 음악계로서는 가장 아까운 사람의 죽음을 의미했다.
육신으로는 죽었지만 채동선은 살아있다. 음악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곡 ‘고향’으로 남아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뇨”(정지용 시).
우리 정부는 홍난파와 현제명에게는 금관문화훈장을, 채동선에게는 은관 문화훈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채동선은 앞의 두 사람보다 음악적으로 더 앞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과거 행적에서 더 떳떳한 사람이었다. 그런 것에 별 의미 부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가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가 좀 더 살았더라면 음악에서도 대단한 꽃밭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대표적인 친일파 음악가였던 홍난파를 그의 작품 ‘봉선화’가 어쩌다가 일제에 의하여 금지곡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일약 민족음악가로 추앙하여 오늘날도 국내 최고의 “난파 음악제”가 열리고 “난파상”이 음악가에게 최고의 영예로운 상이 되었는지 그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우리 스스로가 역사를 왜곡하여 민족음악을 그토록 사랑했던 세종 당시의 향악 주의자인 재상 맹사성이나 홍난파와 동시대 인물인 민족음악가 채동선을 우대하지도 못하고 기념하지도 못하고 그 이름들을 기억조차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레포트를 하면서 일제강점기에 국악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과 창극과 아리랑 그리고 창가, 동요, 트롯에 이르기까지 지금 현재 존재하고 있는 대부분 음악의 분야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이런 분야의 음악들이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래도 일제강점기를 거치지 않고 그냥 순탄하게 역사가 흘렀다면 우리나라의 음악이 더 많은 발전과 또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장르들이 생겨나지는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면서 아쉬움이 남는다.
친일의 역사에 빛을 비추는 것은 제대로 된 역사를 알기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인 것 같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음악을 극복하는 길이다. 특히 교과서에서 그런 일이 필요한 것 같다.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잔재들을 청산하고 국가경쟁력과 의용적인 창작 열의를 고취 고유의 민족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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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11
  • 저작시기2003.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54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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