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판인쇄][금속활자][도활자][한글활자인쇄][조선의 인쇄술][인쇄][인쇄술][활자인쇄]목판인쇄의 역사, 금속활자의 역사, 도활자와 한글활자 인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의 인쇄술 분석(목판인쇄, 금속활자,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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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목판인쇄][금속활자][도활자][한글활자인쇄][조선의 인쇄술][인쇄][인쇄술][활자인쇄]목판인쇄의 역사, 금속활자의 역사, 도활자와 한글활자 인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의 인쇄술 분석(목판인쇄, 금속활자, 인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목판인쇄의 역사
1.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2. 고려시대
3. 조선시대

Ⅲ. 금속활자의 역사
1. 고려시대
2. 조선시대
1) 태종
2) 세종대왕
3) 세조
4) 숙종
5) 정조

Ⅳ. 도활자와 한글활자 인쇄
1. 도활자 인쇄
2. 한글활자 인쇄

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의 인쇄술

참고문헌

본문내용

어 드나듬이 있다. 정조 때에 이르러서는 문예진흥정책의 촉진을 위해 선왕들의 인쇄사업을 계승하여 적극 발전시키는 한편, 청나라와의 인쇄문화 교류를 통해 새로운 활자체를 받아들여 우리의 활자인쇄문화를 더욱 찬란하게 꽃피게 하였다. 청나라의 사고전서에 들어 있는 취진판식[강희자전]을 입수하여 바탕으로 \'생생자\'를 만들었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정리자\'를 주성하여 많은 책을 찍어냈다. 이 활자에 한글활자를 병용하여 찍은 책에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가 있는데, 한글활자는 마치 붓으로 쓴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부드러운 필서체이다. 이를 흔히 \'초주정리라 병용 한글자\' 또는 \'오륜행실한글자\'라 일컫고 있다. 이 초조 정리자는 1857년 주자소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 다시 주성하였는데, 이 \'재주정리자\'는 한말에 이르기까지 학부교과서. 법령. 조약서. 관보 등의 인쇄에 사용되었다. 그 인쇄물들 중에서도 한글활자가 병용된 국한문본이 적지 않게 전래되고 있다. 구한국시대에는 학부에서 후기교관인서체활자를 본따서 나무로 한자 및 한글활자를 만들어 마멸된 후기교서관 철활자와 섞어 새로 편찬한 국한문 교과서를 찍어냈고,1816년에 박종경(朴宗慶)이 사사로이 주조한 전사자로 찍은 인본에도 한글활자가 병용되고 있다. 이들 한글활자는 나무로 조잡하게 만든 인서자체인 점에서 그 특징이 서로 공통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이 연으로 만든 \'신식한글자\'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앞선 것은 1880년 일본에서 최지혁의 글씨를 바탕으로 찍은 [한불자전]이며, 국내에서는 1883년 박문국이 설치된 이후 찍어낸 인쇄물이 초기의 것에 해당한다.
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의 인쇄술
일본은 목판 인쇄에 있어 이른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신라에서 건너간 인쇄술로 보이지만 764-70년 사이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목판에 새겨서 많이 찍었으며 이 목판본이 여러 벌 남아 있다. 고려 때 1007년의 보협인다라니경(寶莢印陀羅泥經)보다 46년 뒤에 찍혀진 책도 있다. 일본은 목판인쇄술을 이같이 8세기 때부터 시작하였고 신라, 고려, 조선 때까지 바로 바로 책을 가져갔고 인쇄술도 배워갔다. 임진왜란 동안에 기술자를 데려가서 인쇄문화를 일으킨 것으로 나타나며 조금씩 우리 뒤를 따라서 발달하였다. 또는 우리의 기술자들이 건너가서 문화를 전달하고 가르쳐 준 것이었다. 1592년 임진년에 일본의 도요도미(豊臣秀吉)가 일본 영주들의 싸움판에서 일어나서 일본을 안전하게 통치하려면 서부쪽 영주들의 서구식 무력과 부력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힘을 빼기 위하여 이들이 조선을 쳐들어 오게 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지체가 낮은 집안에서 일본의 통치자가 된 도요도미는 정권을 오래 부지하기 위하여 서쪽의 영주들을 이 싸움에서 힘을 잃게 하였으나 활자를 일으키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지만 그 후 유학, 의학, 자기 기술들의 발달에 기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이 문화의 모든 면에서 앞서 있어 침략의 대상이 되었다. 문치에 힘들인 태종-세종 때의 문화전통은 일본에 의해서 짓밟히고 많은 기술자는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이 주자학을 으뜸으로 하는 유가 윤리 및 통치법, 인쇄술, 도자기술이었다. 활자 부어내는 기술자였던 임오관(林五官)도 끌려간 사람으로 그는 스루가판 활자를 부어 만드는 우두머리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먼저 임란 다음 해인 1593년에는 권학문(勸學文)을 칙판 활자판으로 찍었는데 조선에서 가져간 계미자 갈래의 활자로 찍었다. 이는 조선에서 들여간 인쇄법에 의한 것이었다. 나무활자로서 일본에 건너간 것도 제법 알려졌다고 하는데 교토의 원광사와 평안박물관에 있음이 알려졌고 도쿄의 다이도구 돗빵인쇄주식회사에는 놋쇠 큰 활자 866개, 놋쇠 작은 활자 31,300개, 나무 활자 5,813개가 있다. 이 밖에도 조선에 쳐들어 왔던 장수의 집 또는 그들에게서 선물로 받은 활자들이 궁, 영주였던 집안에 남아있을 것으로 보인다. 돗빵인쇄주식회사에 있는 활자는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1962년에 지정된 바 있었으나 그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었다
참고문헌
강호제, 인쇄술과 문명의 발전 : 또 하나의 \'Why Not Question\'\'. 서울대학교.박병선, 2002, 박문열, 1999, 고인쇄출판문화사론. 피아이.
손보기, 2000, 금속활자와 인쇄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안춘근, 1990, 한국서지학 원론. 범우사.
천혜봉, 1993, 한국금속활자본. 범우사.
한국의 인쇄. 청주 고 인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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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8.10.02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8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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