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성스러움(르네 지라르) 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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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폭력과 성스러움(르네 지라르) 내용 요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뒤에 가서는 바로 자신이 가장 뛰어난 제사장이 되어 그 제의를 집행한다. 이것은 속죄양이 <총체적인> 폭력 작용과 일치함을 보여주고 있다.
왕의 근친상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바로 그 왕국의 제도라는 제의의 문맥에서 그것을 보아야 한다. 왕이 바로 미래의 희생자, 다시 말해서 속죄양이 대리자라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희생제의의 효과를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근친상간은 <그것이 갖고 있는 기이함 그 자체 때문에> 지속되고 있다.
근친상간은 왕에게 위엄있는 특성을 부여하는데, 그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이 위반이 원초적 희생물을 환기시켜서 그 죄인의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러한다.
우리는 초석적 폭력이 신화와 제의의 <모든>의미의 모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극단적인 경우인 완전히 자발적인, 말하자면 절대적인 폭력일 때는 문자 그대로 진실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완전히 본래의 것과 이 제의의 완벽한 반복 사이에서 행해지는 집단 행위에 대해 문자 그대로 무한히 많은 중간 단계가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화와 제의가 세부사항에서는 무한히 변화할 수는 있지만, 언제나 몇 개의 중요한 테마들을 빠뜨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 중의 하나가 근친상간 테마이다. 고립된 한 개인이 희생위기, 다시 말해서 모든 차이소멸의 책임자로 간주되면, 곧 그는 반드시 결혼 규칙 같은 기본적인 규칙의 파괴자, 달리 말해서 본질적인 <근친상간자>라고 규정지어지게 된다.
제의적 사고는 건국의 메커니즘을 반복하려 한다. 질서를 잡고 평정시키고 화해시키는 만장일치는 언제나 반대의 것, 다시 말해서 분리시키고 평준화하고 파괴시키는 폭력의 절정에 뒤이어 나타난다. 악한폭력으로부터 질서와 평화라는 지고의 선으로 이행은 거의 순간적으로 행해진다. 공동체가 다시 만장일치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짧은 순간의 무시무시한 <상반된 것의 결합>속에서이다.
폭력과 비폭력의 차이에는 임의적인 것이나 상상적인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것을 폭력의 차이로 취급한다.
애초에 있었던 왕의 근친상간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놓고서 제의적 사고가 두개의 정반대적인 해결책을 채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악한 폭력과 선한 폭력의 차이란 것이 실은 임의적이며 동시에 근본적이라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문화는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을 범하고 싶다는 보편적인, 그러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이 욕망에 의해 굴절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프로이트의 생각은 틀렸다. 그러나 그가 틀린 것에도 종종 일리가 있다.
백일하에 드러난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은 과연 무엇을 감출 수 있단 말인가?
근친상간이 환원할 수 없는, 즉 가장 원초적인 사건인 것은 아니다. 근친상간은 친부살해, 죄악, 퇴폐, 그리고 신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형태의 잔인무도함이나 괴상망측함과 같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암시라고 보아야 한다. 이 모든 테마들은 폭력의 무차별화 현상을 나타내기보다는 더 많은 부분을 다른 것처럼 가장하여 숨기고 있다. 신화 속에 있는 억압된 진실이 바로 이 폭력의 무차별화 현상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욕망이라기보다는 공포, 즉 절대적 폭력에 대한 공포이다. 이 욕망 너머에 , 욕망보다 더 강하여 욕망을 침묵시키고 제압할 수 있는 이 이름모를 공포가 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신화의 감추어진 토대는 성욕이 아니다. 그것은 드러나기 때문에 진정한 토대가 아니다. 성욕은 폭력과 서로 경쟁함으로써 폭력이 폭발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그 정도의 의미에서 토대의 일부를 이룬다.
성욕은 폭력을 숨기고 있는 마지막 가면이자 동시에 폭력이 드러나는 출발점이 된다.
제 5장 디오니소스
축제 : 금기시 되었던 것들을 허용하고, 차이의 소멸을 불러일으킴.
축제적인 요소가 축제의 존재이유가 아니라 그 절정과 결말에 나타나는 희생의 준비.
차이의 위기와 상호적 폭력은 카타르시스적인 해결의 필수적인 선행요건.
축제는 희생위기와 그 해결의 연속성을 가정하는 폭력해석에 기반.
축제는 이전의 끔찍한 단계를 생략하면서도 폭력적 만장일치의 이로운 효과를 재생산.
더 복합적이고 위기와 질서의 관계가 더 담겨있는 혼합형(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다 고려)
→이들을 구분하는 것은 본질적 폭력을 회피하는 것, 즉 한층 더 진행된 신화 생성에서 나온 그 위의 현상
위기의 기간 동안에는 폭력으로써 적대자를 찍소리도 못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희생 / 악력 추방제의)
축제의 변질 - \'긴장완화의 측면\'
『바카스의 여신도들』신/인간, 남/녀, 동물/인간간의 차이소멸, 희생위기, 희생양에 대한 일치된 집단 폭력 등 폭력의 진행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비극 속에 담긴 정신은 신화제의적인 의미를 상호적 폭력 속에 융해시킨다. 그것은 모든 차이들의 자의성을 폭로한다.
디오니소스는 가장 끔찍한 악의 화신일 때 공포의 대상, 숭배의 대상이 되고 깨뜨린 평화 를 스스로 다시 복구함으로써 그것을 정당화시킨다.
펜테우스의 욕망은 무례한 것이 되고(휴브리스) 그의 죽음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그에게 행해지는 폭력은 은폐된다.
제의는 근거 없는 새디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폭력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평정을 향하고 있다. 이것을 만들어내려고 애쓰는 독특한 유형의 폭력은 <폭력을 추방하는 폭력> 이다.
종교적인 것은 폭력을 비인간화시켜서 인간을 폭력적인 것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인간에게서 폭력을 떼어내어 그것을 항상 있어온 초월적 위험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종교적인 것 은 그것의 궁극적인 토대가 드러나지 않을 때에만 사람들을 보호한다.
신화생성은 그것의 폭력적인 모습이 가려져 있는 희생양에 근거하고 있는 무의식적인 과정이고 이 폭력의 진실은 <억압되는>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가 신격화된다.
『바카스의 연신도들』에서 주인공은 남자 둘이지만 폭력의 주도권은 여자들이 잡고 있다. 이것은 카스제에 의한 혼란을 전적으로 여자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킴으로써 남성의 권위와 존엄을 공고히 하는 불균형적인 형식으로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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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8.12.19
  • 저작시기2006.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237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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