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보려들면 우리의 기독교(교회)는 마치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이 하는 게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은 복음적인 태도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기 전에 무언가에 대해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골똘히 진지하게 고민중인 사람에게, 찬물을 껴얹는 태도는 보이지 말라는 것을 말하고 싶고, 고민하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정말로 진리를 알 수 있고, 더욱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이다. 복음적으로 생각하고 고민 없이 그냥 무조건 <아멘> 하고 믿으려고 하는 편이 분명히 자기를 위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위해서도 모든 것을 볼 때 분명히 더욱더 확실히 편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자신 있게 힘주어 말할 수 있다. 분명히 힘들게 고민하고 연구하는 자에게 진리를 위해 의문을 가지고 도전하는 자에게는 처음에는 아니 어쩌면 영원히 핍박을 받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밑바탕에는 아니, 한번쯤은 고민을 해보고 분명히 의심을 해보았을 문제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그 의문이 가는 부분을 고민 할 가치가 있는 문제를 그냥 묵인하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바쁘다. 이러한 태도는 평생 큰 발전이 없을 것이다. 마치 오늘의 숙제를 영원히 미루어둔 듯한 찜찜한 느낌일 것이다.
더구나 나는 이 책에서 아하스 패르츠가 제기한 논리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이렇게 힘든 계명을 주셔서 우리들이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주어서 우리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고, 너무 많은 것으로 우리를 제한시키나 하는 생각을 나는 때론 심각하게 생각하곤 했었다. 아하스 패르츠의 말처럼 우리는 그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또한, 나는 진지하게 신학대학에 와서 민요섭과 같은 아하스 패르츠와 같은 고민을 솔직히 많이 해보았다. 그래서 인지 나는 이 책의 민요섭과 아하스 패르츠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었고, 특히 수많은 나라의 신들을 찾아 떠났을 때 아하스 패르츠의 모습들을 보고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도 정말 우리가 만들어 낸 신이 아닌가? 아하스 패르츠의 말처럼 주님이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하며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 또 인상깊게 남았던 것은 우리에게 왜 자유의지를 주었냐는 문제다. 나는 이것에 대해서도 평소에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었다. 자유의지를 주어 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심판의 그 날에야 비로서 우리를 방관하시다가 심판하느냐는 물음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심판의 하나님이기도 한 하나님을 볼 때 나는 솔직히 아직도 맨땅에 헤딩하는 격으로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왜 우리는 힘들게 애써 간구 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냐. 분명히 성경에는 우리의 빌 바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성령님이 우리의 빌 바를 이미 아신다고 했다. 이미 우리의 빌 바를 알고 계신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꼭 간절한(간이절이도록) 기도를 바라시는 것일까? 왜 우리가 구할 때 노력할 때 곧바로 임하시지 않는 것일까? 물론 이러한 나의 반응은 민감한 반응이란 것도 잘 알고, 삐뚤어진 반응이란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의 내 거침없는 속 내음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성경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지식이 많이 부족하니, 비판하기 보다는 먼저 받아들이고, 내가 충분히 공부한 다음에 그때에 비판하기로 나의 숙제를 우선 뒤로 미뤄두기로 한다. 하지만 나는 민요섭과 조동팔과 아하스 패르츠가 그러했듯이 배우면 배울수록,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교리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그들이 엘리트 성적을 유지하는 자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많은 갈등을 겪었던 것처럼 나도 신학교에 와서 그냥 고등학교 때까지의 나의 믿음은 단순히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피곤하게 하려 하지도 않았다. 나의 힘든 육체를 위해, 고민을 위해 단지 의지하고 기도 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의 상황은 다르다. 내가 실질적으로 교회에서 사역할 때 성령 충만을 받지 않으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이 교회에서 봉사를 한다면 그것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남들처럼 내세울 주님을 체험한 큰 사건도, 큰 체험도 없는 모태신앙으로 지금껏 어찌보면 미지근한 신앙으로 지금 이 자리까지 달려왔다고 해도 어쩌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갈급해 하고 목말라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나도 마음껏 체험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신앙은 말로는 설명 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지 않은가? 마치 사람의 좋아하는 감정도 말로 전부 해석해서 풀이하여 형언 할 수 없듯이 주님의 섭리도, 사랑도 신앙 그것은 거기에 비할 나위 없이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인지 몰라도 주님의 체험이 부족한 나로서는 신학교에 와서부터 인지 또 제 딴에는 조금 배웠다고 툭 하면 설교비판이나 하고, 언제부터인지 내 삶 속에 나도 모를 허전함이 맴돌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 사람의 아들이란 책을 통하여 나는 정말 마치 나의 고민을 누가 적어다 준 것 같은 후련함을 느낄 수 있었고 이렇게 많은 친구들과 같이 이런 주제를 놓고 공부를 하고 고민을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은 기회가 된 것 같다. 나는 은근히 결론 부분을 과연 어떻게 처리할까? 하며 기대를 하며 이 소설에 푹 빠져있었지만, 이 책의 결론은 마치 나의 대답과도 같은 결론 이였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믿는 신 하나님에 대해 결론적으로 아직도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아하스 패르츠 같은 민요섭같은 그런 고민이 아직도 남아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나의 고민을 알고 나의 신앙의 문제점을 알기에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열심히 배우고 익히고 기도하고 나의 독단에 빠지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의견도 수용하며 포괄적으로 이 시대의 문화를 수용하고 너무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너무 성서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조직신학의 4가지 기능의 적절한 조화를 항상 생각하며 주님의 진리를 위해 나아 갈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복음적인 태도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기 전에 무언가에 대해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골똘히 진지하게 고민중인 사람에게, 찬물을 껴얹는 태도는 보이지 말라는 것을 말하고 싶고, 고민하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정말로 진리를 알 수 있고, 더욱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이다. 복음적으로 생각하고 고민 없이 그냥 무조건 <아멘> 하고 믿으려고 하는 편이 분명히 자기를 위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위해서도 모든 것을 볼 때 분명히 더욱더 확실히 편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자신 있게 힘주어 말할 수 있다. 분명히 힘들게 고민하고 연구하는 자에게 진리를 위해 의문을 가지고 도전하는 자에게는 처음에는 아니 어쩌면 영원히 핍박을 받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밑바탕에는 아니, 한번쯤은 고민을 해보고 분명히 의심을 해보았을 문제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그 의문이 가는 부분을 고민 할 가치가 있는 문제를 그냥 묵인하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바쁘다. 이러한 태도는 평생 큰 발전이 없을 것이다. 마치 오늘의 숙제를 영원히 미루어둔 듯한 찜찜한 느낌일 것이다.
더구나 나는 이 책에서 아하스 패르츠가 제기한 논리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이렇게 힘든 계명을 주셔서 우리들이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주어서 우리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고, 너무 많은 것으로 우리를 제한시키나 하는 생각을 나는 때론 심각하게 생각하곤 했었다. 아하스 패르츠의 말처럼 우리는 그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또한, 나는 진지하게 신학대학에 와서 민요섭과 같은 아하스 패르츠와 같은 고민을 솔직히 많이 해보았다. 그래서 인지 나는 이 책의 민요섭과 아하스 패르츠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었고, 특히 수많은 나라의 신들을 찾아 떠났을 때 아하스 패르츠의 모습들을 보고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도 정말 우리가 만들어 낸 신이 아닌가? 아하스 패르츠의 말처럼 주님이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하며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 또 인상깊게 남았던 것은 우리에게 왜 자유의지를 주었냐는 문제다. 나는 이것에 대해서도 평소에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었다. 자유의지를 주어 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심판의 그 날에야 비로서 우리를 방관하시다가 심판하느냐는 물음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심판의 하나님이기도 한 하나님을 볼 때 나는 솔직히 아직도 맨땅에 헤딩하는 격으로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왜 우리는 힘들게 애써 간구 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냐. 분명히 성경에는 우리의 빌 바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성령님이 우리의 빌 바를 이미 아신다고 했다. 이미 우리의 빌 바를 알고 계신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꼭 간절한(간이절이도록) 기도를 바라시는 것일까? 왜 우리가 구할 때 노력할 때 곧바로 임하시지 않는 것일까? 물론 이러한 나의 반응은 민감한 반응이란 것도 잘 알고, 삐뚤어진 반응이란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의 내 거침없는 속 내음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성경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지식이 많이 부족하니, 비판하기 보다는 먼저 받아들이고, 내가 충분히 공부한 다음에 그때에 비판하기로 나의 숙제를 우선 뒤로 미뤄두기로 한다. 하지만 나는 민요섭과 조동팔과 아하스 패르츠가 그러했듯이 배우면 배울수록,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교리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그들이 엘리트 성적을 유지하는 자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많은 갈등을 겪었던 것처럼 나도 신학교에 와서 그냥 고등학교 때까지의 나의 믿음은 단순히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피곤하게 하려 하지도 않았다. 나의 힘든 육체를 위해, 고민을 위해 단지 의지하고 기도 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의 상황은 다르다. 내가 실질적으로 교회에서 사역할 때 성령 충만을 받지 않으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이 교회에서 봉사를 한다면 그것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남들처럼 내세울 주님을 체험한 큰 사건도, 큰 체험도 없는 모태신앙으로 지금껏 어찌보면 미지근한 신앙으로 지금 이 자리까지 달려왔다고 해도 어쩌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갈급해 하고 목말라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나도 마음껏 체험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신앙은 말로는 설명 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지 않은가? 마치 사람의 좋아하는 감정도 말로 전부 해석해서 풀이하여 형언 할 수 없듯이 주님의 섭리도, 사랑도 신앙 그것은 거기에 비할 나위 없이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인지 몰라도 주님의 체험이 부족한 나로서는 신학교에 와서부터 인지 또 제 딴에는 조금 배웠다고 툭 하면 설교비판이나 하고, 언제부터인지 내 삶 속에 나도 모를 허전함이 맴돌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 사람의 아들이란 책을 통하여 나는 정말 마치 나의 고민을 누가 적어다 준 것 같은 후련함을 느낄 수 있었고 이렇게 많은 친구들과 같이 이런 주제를 놓고 공부를 하고 고민을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은 기회가 된 것 같다. 나는 은근히 결론 부분을 과연 어떻게 처리할까? 하며 기대를 하며 이 소설에 푹 빠져있었지만, 이 책의 결론은 마치 나의 대답과도 같은 결론 이였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믿는 신 하나님에 대해 결론적으로 아직도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아하스 패르츠 같은 민요섭같은 그런 고민이 아직도 남아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나의 고민을 알고 나의 신앙의 문제점을 알기에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열심히 배우고 익히고 기도하고 나의 독단에 빠지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의견도 수용하며 포괄적으로 이 시대의 문화를 수용하고 너무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너무 성서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조직신학의 4가지 기능의 적절한 조화를 항상 생각하며 주님의 진리를 위해 나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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