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탑의 개념과 목적
Ⅲ. 탑의 시작
Ⅳ. 탑의 변천
Ⅴ. 탑의 구분
1. 주재료별 구분
2. 지역별 구분
3. 시대별 구분
Ⅵ. 고구려의 탑
Ⅶ. 백제의 탑
Ⅷ. 신라의 탑
참고문헌
Ⅱ. 탑의 개념과 목적
Ⅲ. 탑의 시작
Ⅳ. 탑의 변천
Ⅴ. 탑의 구분
1. 주재료별 구분
2. 지역별 구분
3. 시대별 구분
Ⅵ. 고구려의 탑
Ⅶ. 백제의 탑
Ⅷ. 신라의 탑
참고문헌
본문내용
림이 삼국유사의 요동성탑에 대한 기록과 어느 정도 부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유사에는 평양의 대보산에 영탑 사팔각 칠층석탑을 세우게 된 내력도 적혀있어 팔각다층석탑의 존재를 일러주고 있는 셈이된다. 그리고 실제로 평양의 청암리절터. 정릉사터, 대동군의 상오리 절터등지에서 조사된 탑자링서는 제법규모가 큰 팔각의 목탑이 세워졌던 자취가 확인되었는데, 이탑들은 한결같이 절 안의 한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주변의 동, 서, 북편에는 법당이 하나씩 배치되는 이른바 1탑 3당식의 배치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이상의 사실들을 검토해 보면 고구려의 불탑으로 기록상으로는 토탑이나 석탑이 일부 존재하였을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거대한 8각 다층의 목탑이 주류를 이루면서 조탑술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추정된다.
Ⅶ. 백제의 탑
백제의 조탑기술은 실로 뛰어났음이 국내외의 자료와 유적으로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상의 불탑으로 기록되는 신라 황룡사 구층탑도 사실은 백제의 공장 아비지가 신라의 초청으로 백여명의 기술자를 이끌고 가서 완성한 것이며, 일본최고의 탑으로 알려진 호류지의 목탑도 백제의 목탑은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오직 국립부여박물관에 청동으로 제작된 탑신 일부가 전하고 있어 당시의 목탑의 형태를 추정할 뿐이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목탑의 자취 또한 부여와 익산지역에 편중되어 있을 뿐이며 그중에서 대표적인 목탑의 자취는 부여의 군수리 절터와 익산의 미륵사터, 제석사터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의 탑에서 현저한 특징으로 주목 되는 것은 7세기이후에 목탑을 석탑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익산의 미륵사지석탑은 낮은 2층 기단위에 석재를 목재와 같이 잘게 나누어 짠 목조건물 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1층 탑신의 네 면은 밑이 넓고 위가 좁은 기둥들을 각면에 여러 개식 세우고 중심부에는 사방에서 내부로 통하는 통로를 내어 목탑에서의 사방을 출입문을 내는 형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탑신 내부의 중심부에는 탑신을 떠받치는 중심축과 같은 철주가 세워져 있는 것도 목탑의 구조와 흡사하다. 뿐만 아니라 기둥위로 처마를 구성하는 방식이나 넓은 판석을 덮어 지붕을 내고 추녀 끝에 네귀에서 살짝 위로 올린 듯 처리한 것도 목탑과 비슷하여 이 탑은 비록 석탑이지만 전체적인 외형은 목탑을 충실이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에서 더욱 정제되어 나타난다. 즉 낮은 기단위로 네귀에 안정감 있는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사이의 벽은 두장의 판석을 잇대어 마치 사방으로 출입문을 달아 좋은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처마 밑의 석재 맞춤방식은 미륵사탑보다 간략화 되면서 정림사 탑 특유의 예술성을 가미하였고 지붕돌은 평활하여 여유가 있으며, 2층이상의 탑신부를 설계함에 있어서도 정확한 감축비율이나 규칙성들의 질서를 잃지 않고 있어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완벽하고 조형기법이 탁월한 새로운 백제석탑으로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석탑의 기원은 백제에서 시작되었고 석탑의 원형은 목탑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하겠는데 이와 같이 목탑을 토대로하여 새로운 석탑양식을 이룩한 창의성은 고도로 축적된다. 백제인의 조탑기술이 뒷받침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백제의 석탑은 삼국통일 이후의 신라석탑이 완성되기까지 기본적인 구성형식에 상당한 영향을 주어 통일신라 석탑형식의 정립에 공헌한 바가 크다고 하겠다.
Ⅷ. 신라의 탑
신라의 불교는 법흥왕의 공인과 함께 급속도로 성장하여 원광, 자장과 같은 고승이 배출되고 이들이 중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로는 불교문화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신라의 불탑은 불교공인이 늦어진 관계로 불탑의 조영도 6세기 중엽이후에야 이루어지게 된다. 초창기의 불탑은 고구려나 백제와 마찬가지로 목탑이 먼저 세워졌는데 그 자취가 홍륜사나 천주사등지의 잡자리에 남아있다. 진흥왕대에 이르러서는 궁궐을 지으려던 터에 우물에 서용이 나타난다는 상서로운 기운이 잃게 되자 이 궁터에 신라최대의 사찰인 황룡사를 짓고 절 한가운데에는 9층목탑을 세우고 법당에는 장육삼존불상을 안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황룡사의 9층 목탑은 높이가 226척에 해당하는 큰 탑으로 이 탑과 수백칸에 이르는 건물들을 세우는 대공사를 계획하면서 신라왕실은 이 사업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아비지를 비롯한 백제의 장인들을 초빙하여 공사를 진행하게 되었고, 실로 60여년의 세월이 흘러 신덕여왕대에 이르러서야 건물들과 탑이 모두 제격을 갖추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경주 황룡사터의 탑자리에는 사방으로 계단을 올린기단 위로 사방 일곱칸에 해당하는 탑신의 기둥을 세웠던 수십 개의 육중한 주춧돌들이 남아있어 황룡사구층목탑의 규모를 짐작하게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신라에서도 불탑의 주류를 이루었던 목탑의 전통은 통일신라시대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신라에서도 7세기에 들어 석탑이 선보이게 된다. 현재 경주에 일부가 남아있는 분황사 모전석탑은 선덕여왕 3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 탑은 목탑을 모델로 한 백제의 석탑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중국의 전탑을 모방하여 일일이 돌을 멱돌처럼 잘라서 이를 포개고 짜 맞추어 세운 것이다.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5층탑으로 여겨지며 규모가 제법 큰 탑에 속하고 있다. 탑의 기단 위에는 네모충이에 돌사자를 배치하고 1층탑신의 네벽에는 돌로 문틀을 짜고 널찍한 돌로 출입문도 달아 내부로 통할 수 있게 하였는데. 문의 양옆에는 인왕상이 조각되어 험상궂은 표정으로 문을 지키고 있다. 또 벽돌모양의 석재로 탑을 만들다보니 탑에는 전혀 기둥이 없고 처마 밑과 지붕 위의 경사면은 자연히 층이 지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의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이 신라에서 처음석탑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1. 강우방, 한국 불교조각의 흐름, 대원사
2. 김희경, 탑, 열화당 한국의 미술2, 1982
3. 장충식, 신라 석탑 연구 일지사, 1987
4. 정영호, 석탑, 대원사
5. 천득염, 백제계석탑 연구, 전남대학교 출판부
6. 황수영, 한국의불교 공예, 탑파, 혜안, 1998
이상의 사실들을 검토해 보면 고구려의 불탑으로 기록상으로는 토탑이나 석탑이 일부 존재하였을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거대한 8각 다층의 목탑이 주류를 이루면서 조탑술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추정된다.
Ⅶ. 백제의 탑
백제의 조탑기술은 실로 뛰어났음이 국내외의 자료와 유적으로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상의 불탑으로 기록되는 신라 황룡사 구층탑도 사실은 백제의 공장 아비지가 신라의 초청으로 백여명의 기술자를 이끌고 가서 완성한 것이며, 일본최고의 탑으로 알려진 호류지의 목탑도 백제의 목탑은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오직 국립부여박물관에 청동으로 제작된 탑신 일부가 전하고 있어 당시의 목탑의 형태를 추정할 뿐이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목탑의 자취 또한 부여와 익산지역에 편중되어 있을 뿐이며 그중에서 대표적인 목탑의 자취는 부여의 군수리 절터와 익산의 미륵사터, 제석사터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의 탑에서 현저한 특징으로 주목 되는 것은 7세기이후에 목탑을 석탑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익산의 미륵사지석탑은 낮은 2층 기단위에 석재를 목재와 같이 잘게 나누어 짠 목조건물 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1층 탑신의 네 면은 밑이 넓고 위가 좁은 기둥들을 각면에 여러 개식 세우고 중심부에는 사방에서 내부로 통하는 통로를 내어 목탑에서의 사방을 출입문을 내는 형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탑신 내부의 중심부에는 탑신을 떠받치는 중심축과 같은 철주가 세워져 있는 것도 목탑의 구조와 흡사하다. 뿐만 아니라 기둥위로 처마를 구성하는 방식이나 넓은 판석을 덮어 지붕을 내고 추녀 끝에 네귀에서 살짝 위로 올린 듯 처리한 것도 목탑과 비슷하여 이 탑은 비록 석탑이지만 전체적인 외형은 목탑을 충실이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에서 더욱 정제되어 나타난다. 즉 낮은 기단위로 네귀에 안정감 있는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사이의 벽은 두장의 판석을 잇대어 마치 사방으로 출입문을 달아 좋은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처마 밑의 석재 맞춤방식은 미륵사탑보다 간략화 되면서 정림사 탑 특유의 예술성을 가미하였고 지붕돌은 평활하여 여유가 있으며, 2층이상의 탑신부를 설계함에 있어서도 정확한 감축비율이나 규칙성들의 질서를 잃지 않고 있어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완벽하고 조형기법이 탁월한 새로운 백제석탑으로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석탑의 기원은 백제에서 시작되었고 석탑의 원형은 목탑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하겠는데 이와 같이 목탑을 토대로하여 새로운 석탑양식을 이룩한 창의성은 고도로 축적된다. 백제인의 조탑기술이 뒷받침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백제의 석탑은 삼국통일 이후의 신라석탑이 완성되기까지 기본적인 구성형식에 상당한 영향을 주어 통일신라 석탑형식의 정립에 공헌한 바가 크다고 하겠다.
Ⅷ. 신라의 탑
신라의 불교는 법흥왕의 공인과 함께 급속도로 성장하여 원광, 자장과 같은 고승이 배출되고 이들이 중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로는 불교문화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신라의 불탑은 불교공인이 늦어진 관계로 불탑의 조영도 6세기 중엽이후에야 이루어지게 된다. 초창기의 불탑은 고구려나 백제와 마찬가지로 목탑이 먼저 세워졌는데 그 자취가 홍륜사나 천주사등지의 잡자리에 남아있다. 진흥왕대에 이르러서는 궁궐을 지으려던 터에 우물에 서용이 나타난다는 상서로운 기운이 잃게 되자 이 궁터에 신라최대의 사찰인 황룡사를 짓고 절 한가운데에는 9층목탑을 세우고 법당에는 장육삼존불상을 안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황룡사의 9층 목탑은 높이가 226척에 해당하는 큰 탑으로 이 탑과 수백칸에 이르는 건물들을 세우는 대공사를 계획하면서 신라왕실은 이 사업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아비지를 비롯한 백제의 장인들을 초빙하여 공사를 진행하게 되었고, 실로 60여년의 세월이 흘러 신덕여왕대에 이르러서야 건물들과 탑이 모두 제격을 갖추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경주 황룡사터의 탑자리에는 사방으로 계단을 올린기단 위로 사방 일곱칸에 해당하는 탑신의 기둥을 세웠던 수십 개의 육중한 주춧돌들이 남아있어 황룡사구층목탑의 규모를 짐작하게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신라에서도 불탑의 주류를 이루었던 목탑의 전통은 통일신라시대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신라에서도 7세기에 들어 석탑이 선보이게 된다. 현재 경주에 일부가 남아있는 분황사 모전석탑은 선덕여왕 3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 탑은 목탑을 모델로 한 백제의 석탑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중국의 전탑을 모방하여 일일이 돌을 멱돌처럼 잘라서 이를 포개고 짜 맞추어 세운 것이다.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5층탑으로 여겨지며 규모가 제법 큰 탑에 속하고 있다. 탑의 기단 위에는 네모충이에 돌사자를 배치하고 1층탑신의 네벽에는 돌로 문틀을 짜고 널찍한 돌로 출입문도 달아 내부로 통할 수 있게 하였는데. 문의 양옆에는 인왕상이 조각되어 험상궂은 표정으로 문을 지키고 있다. 또 벽돌모양의 석재로 탑을 만들다보니 탑에는 전혀 기둥이 없고 처마 밑과 지붕 위의 경사면은 자연히 층이 지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의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이 신라에서 처음석탑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1. 강우방, 한국 불교조각의 흐름, 대원사
2. 김희경, 탑, 열화당 한국의 미술2, 1982
3. 장충식, 신라 석탑 연구 일지사, 1987
4. 정영호, 석탑, 대원사
5. 천득염, 백제계석탑 연구, 전남대학교 출판부
6. 황수영, 한국의불교 공예, 탑파, 혜안,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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