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남송의 주희는 정자의 학문을 계승해서 <논어>,<맹자>,<대학>,<중용>의 넷을 존숭하고 사서란 이름을 책정하였다. 이로 인해<맹자>도 경전으로서의 지위가 거의 확보되어 남송 말 진진손이 <직제서록해제>에서 처음으로<맹자>를 경전으로 취급하자 비로소 그 지위는 확고부동하게 되었다. 명대의 왕양명이나 이탁오간은 왕학좌파에서는 인간론이나 정치론을 펼 때 <맹자>를 이용했고, 청조의 대진이 <맹자자의소증>을 필생의 작으로서 저술한 것을 보아<맹자>의 영향력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맹자>가 경전으로 높여져 가는 과정은 대략 상술한 바와 같으나, 그 도중에서 비난 공격을 받은 적도 적지 않았다. 이 역시<논어>와 다른 점이다. 가장 오래 된 것은 순자로서 그의 <비십이자편>에서는 자사와 함께 비난의 과녁이 되고 있다. 그후 후한 대의 왕충의 저서<논형>에는 자맹이란 편이 있고, 다시 내려와 송대에는 <맹자>를 존숭하는 기운의 반동으로 많은 반맹론이 나타나 존숭파와의 논쟁이 심했었다. 풍휴의 <산맹자>, 이구의<상어>, 사마광의 <의맹>등은 반맹자의 주된 것이다. 또 명태조는 자기 독재에 방해가 되는 부분을 깎아 버리고 <맹자절문>을 간행했다.
사실 혁명을 긍정하는 사상이나 ‘백성을 귀히 여기고 임금을 가볍게 본다’는 생각은 위정자로서 못마땅하게 생각되었던 것이고, 체제유지를 하는 입장에서 보면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 맹자의 거만스런 태도, 때로는 어른스럽지 못한 태도 등도 반감을 샀다. 그 문장도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과격한 점이 없지도 않다. 이런 것들이<맹자>가 비난과 공격을 받는 주된 이유였다.
<맹자>가 경전으로 높여져 가는 과정은 대략 상술한 바와 같으나, 그 도중에서 비난 공격을 받은 적도 적지 않았다. 이 역시<논어>와 다른 점이다. 가장 오래 된 것은 순자로서 그의 <비십이자편>에서는 자사와 함께 비난의 과녁이 되고 있다. 그후 후한 대의 왕충의 저서<논형>에는 자맹이란 편이 있고, 다시 내려와 송대에는 <맹자>를 존숭하는 기운의 반동으로 많은 반맹론이 나타나 존숭파와의 논쟁이 심했었다. 풍휴의 <산맹자>, 이구의<상어>, 사마광의 <의맹>등은 반맹자의 주된 것이다. 또 명태조는 자기 독재에 방해가 되는 부분을 깎아 버리고 <맹자절문>을 간행했다.
사실 혁명을 긍정하는 사상이나 ‘백성을 귀히 여기고 임금을 가볍게 본다’는 생각은 위정자로서 못마땅하게 생각되었던 것이고, 체제유지를 하는 입장에서 보면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 맹자의 거만스런 태도, 때로는 어른스럽지 못한 태도 등도 반감을 샀다. 그 문장도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과격한 점이 없지도 않다. 이런 것들이<맹자>가 비난과 공격을 받는 주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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