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유역 정치체의 성격
본 자료는 2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해당 자료는 2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2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영산강유역 정치체의 성격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_ 풀리지 않는 고대사의 미스터리
2-1. 근초고왕 남정을 바라보는 시각
2-2. 옹관고분의 발달
2-3. 전방후원분의 구조와 유물
2-4. 전방후원분의 피장자
2-5. 백제 영역화의 양상

3. 맺음말_ 1500년 전, 나주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

본문내용

된 나주 다시면 복암리 3호분이다.
복암리 3호분의 5호 석실과 가장 늦은 시기의 16호 석실에서 발견된 은화관식(銀花冠飾)에 주목해보자. 현재까지 백제지역에서 출토된 은화관식은 모두 8개이다. 복암리 3호분에서 백제의 제 6관등인 내솔(柰率) 이상만이 착용할 수 있는 은화관식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토착적 기반을 가진 자가 이미 중앙의 관등을 수여받고 지방관의 역할을 했음을 말해준다. 영산강유역이 백제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자료라 할 것 이다.
3. 맺음말_ 1500년 전, 나주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
전방후원분이 발견된 이래, 국내 뿐 아니라 한일 양국간에도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 지역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나오지 않고 있다. 문헌자료가 부족하여 고고학 자료들에만 의존하다보니 자료에 대한 분석이 학자들마다 다르고 새로운 유물이 발견될 때마다 또 다시 새로운 의견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연구는, 369년 근초고왕의 남정으로 인해 영산강 유역 정치체는 백제에 복속되어 독자성을 상실하였고, 공납을 통한 간접지배를 거쳐 비로소 5세기 후반 중앙세력의 직접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에 대한 근거가 기존의 옹관고분에서 백제식의 횡혈식 석실묘로의 교체라는 것이 지배적이다. 이 가운데 전방후원분의 피장자는 누구이며 한반도와 일본 열도 가운데 어느 곳에서 먼저 전방후원분이 출현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존재한다.
나주를 끼고 흐르는 영산강은 1500여년 전에도 흘렀고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영산강 주변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수많은 고분들은 그 모습을 드러내며,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잃어버린 1500년 전 나주의 주인공들을 밝혀내기 위하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우리에게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1500년 전의 나주인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리라.
참고문헌
강봉룡, 1999,「영산강유역 '옹관고분' 의 대두와 그 역사적 의미」『한국사론』4142 서울대학교.
박순발, 1998,「4~6세기 영산강유역의 동향」『백제사상의 전쟁』, 충남대 백제연구소.
, 2001,「4-5세기 한국 고대사와 고고학의 몇 가지 문제」『한국고대사 연구 24』한국고대사학회.
신경철, 2000,「고대의 낙동강, 영산강, 그리고 왜」『한국의 전방후원분』충남대 출판부.
이현혜, 2000,「4~5세기 榮山江유역 토착세력의 성격」『역사학보 165호』,역사학회.
임영진, 2000,「영산강유역 석실봉토분의 성격」『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새로운 조명』역사문화학회 목포대박물
관.
, 2003,「한국 분주토기의 기원과 변천」『호남고고학보』17.
주보돈, 2000「백제의 영산강유역 지배방식과 전방후원부 피장자의 성격」『한국의 전방후원분』충남대 출판부.
홍보식, 2006,「한반도 남부지역의 왜계요소-기원후 3-6세기대를 중심으로-」『한국고대사연구』44, 한국고대사학회.
土生田純之, 2000,「漢 日 前方後圓墳의 比較檢討」『한국의 전방후원분』충남대 출판부.

키워드

  • 가격1,6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9.10.21
  • 저작시기2009.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768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