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지 답사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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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학농민혁명지 답사 감상문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출발

◆ 첫 번째 답사지 [무장 기포지]

◆ 두 번째 답사지 [전봉준 장군 생가 터]

◆ 세 번째 답사지 [고창읍성]

◆ 네 번째 답사지 [백산성]

◆ 다섯 번째 답사지 [전봉준 장군 고택]

◆ 여섯 번째 답사지 [황토재 전적지, 동학 농민 혁명 기념관]

◆ 귀로

본문내용

땜에 이사가 잦았단다. 고택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허물어졌다가 1974년에 해체, 보수했는데 상량문이 발견되어 건축시기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설명 들을 땐 상량문이 무엇인지 몰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집에 와서 찾아보니 상량문이란 ‘집을 짓거나 새로 고친 내역, 날짜, 시간 등을 기록하는 글’로 신기하게도 그 당시에 초가집에도 상량문을 새겼다니, 나름 현재의 건축법과 비슷한 법이 있었나 보다. 고택은 새로 지은 것인지라 당시 그대로의 모습대로 원형이 복원 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에도 실제 사용했던 우물은 남아 세월의 굳건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번 답사에서 전봉준 장군의 생가 터와 고택을 들리면서 알게 된 사실이 전봉준 장군이 비록 몰락한 가문이긴 하지만 양반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이제껏 당연하게도 농민혁명이 주도자이기에 당연히 일반 백성, 평민 출신인 줄 알았는데 양반 출신이라는 소릴 듣고 뭔가 이제껏 가지고 있던 ‘양반’에 대한 편견이 깨지는 것 같았다. 조선시대의 양반 하면 성리학의 틀에 갇혀 사는 고리타분한 의식가로만 생각했었는데 시대가 시대인지라 의식이 트이고 생각이 깨인 사람들이 많아 비록 몰락 양반 출신이라도 계급에 차별을 두지 않고 성리학이 아닌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나 보다.
이곳에서 재밌었던 점은 다른 곳은 모두 전봉준 ‘장군’이라고 표기를 해놨었는데 이 곳 안내판에는 전봉준 ‘선생’이라고 써놓은 것이었다. 과연 이 둘의 차이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볼 만한 문제였다.
<전봉준 ‘선생’ 고택지 안내문>
<복원된 고택 모습>
◆ 여섯 번째 답사지 [황토재 전적지, 동학 농민 혁명 기념관]
예상했던 것 보다 답사시간이 많이 지연 되서 마지막으로 예정되었던 삼례봉기 역사광장의 답사는 취소되고 마지막 답사지로 황토재 전적지와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 도착했다. 황토현 전투의 장소로 낮은 구릉지에 위치해 있어 휑한 잔디밭에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그다지 넓지 않은 터에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세워져 있었고 그 밑으론 사찰 같은 것이 보였는데 전봉준 장군의 사당, 기념관, 동상 등이 위치해져 있었다. 이 곳 황토재는 우린 흔히 황토현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현’은 일본식 표현으로 황토재로 바꿔 부르는 것이 더 옳다고 한다. 여러 교과서나 문제집, 심지어 위인전 같은 곳에서도 모두 황토현이라는 표현이 더 많이 보이는데 시급하게 고쳐야할 문제 같다. 1894년 4월 7일 이 곳 황토재에선 동학농민군과 전라감영군이 큰 싸움을 벌였는데 당시의 전투 중에서도 기록 될 만한 대승을 거뒀었다. 황토재 전투는 동학농민군과 관군과의 최초의 전투로 이 곳에서 대승함으로 사기를 충전하게 되고 전주로 진격하게 되는 발판으로 삼아 결국 전주성을 함락, 혁명의 밑거름이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전투이다.
<황토재 전적지 올라가는 길>
<갑오동학혁명 기념탑>
참고로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은 박정희 정권 때 세워진 것이라고 하는데 당시에 박정희정권이 민심을 얻기 위해서 행한 사업 중 하나라고 하는데, 아마도 박정희 정권은 자기의 쿠데타정권을 동학농민혁명과 연계해서 정당성을 찾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안내 선생님께서 dj정권 때 이 곳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에 약 300억 가까이를 투자하기로 했으나 무산되고 3분의 2에 가까운 200억 정도 밖에 유치를 하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이 곳에 위치한 동학농민 혁명 기념관이 전국 최대규모라는 설명을 하셨다. 단체 사진을 찍고 아래에 구릉 반대 쪽 아래에 위치한 사당과 동상이 있는 쪽으로 갔는데, 사실 처음엔 이 곳에 위치한 조금한 전시관을 보고 이것이 전국 최대 규모인줄 알고 많이 실망 했었다. 어째서 200억이나 들인 기념관 사업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 했는데, 알고 보니 이 곳이 아니라 좀 더 밖에 위치해있던 기념관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설레발 친 것이 조금 부끄러워 졌다.
밖으로 나가자 넓은 들판 같은 곳에 오두막이 여러 채 보이고 그 너머로 드디어 전국 최대 규모라는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이 보였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오두막에도 올라가보고 그랬을 텐데 시간에 쫓겨 아쉬움을 달래며 기념관으로 향했다. 기념관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보였던 것은 웬 거대한 나무였는데, 동학농민혁명의 첫 집결지인 말목장터 감나무가 태풍에 쓰러지자 보존 작업을 거쳐 옮겨 놓은 것이었다. 기념관은 어린 학생들이 지루해 하지 않고 흥미롭게 생각할 만한 것들이 많았는데 입구 쪽에 위치해 있던 인다라망 체험실 같은 거울의 방과 퀴즈로 푸는 동학농민혁명, 애니메이션이나 전봉준장군의 재판장면이 움직이는 마네킹의 립싱크로 볼 수 있는 것 등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짧은 답사 과정이었지만 답사 도중 보았던 것들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쉬운 점은 내 체력이 거의 고갈된 상태였던지라 좀 더 열심히 둘러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봉준 장군 동상>
<황토재 전적지 (구) 기념관>
<동학 농민 혁명 기념관>
<말목장터 감나무> <기념관 내에 있던 동학농민혁명 봉기 지도>
<사발통문> <전봉준 장군 심문하는 장면 재연 인형>
◆ 귀로
길었던 하루가 금세 지나고 여정은 모두 끝나고 다시 익산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익숙해진 것인지 돌아오는 길은 멀미를 하지 않아 편하게 오긴 했지만 허전한 것도 많았고 아쉬운 점도 많았고 후회된 점들도 많아 마음은 조금 무거웠다. 좀 더 열심히 볼 것, 좀 더 잘 살펴 볼 것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던 귀가 길이었다.
이번 답사에서 절실하게 느꼈던 것은 제대로 된 용어가 시급하게 확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곳에선 ‘동학농민혁명’이라 칭하고 또 어느 곳에서 ‘동학혁명’이라 칭하는 곳도 있었고, 전봉준 장군에 대한 칭호도 ‘장군’과 ‘선생’ 사이에서 제대로 기준을 잡아야 할 것이다. 또 문화재 보존 문제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너무 관리가 소홀한 부분이 많아서 얼마나 우리가 우리 문화재에 관심이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힘들고 고된 하루였지만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볼 수 있었던 오지 않았으면 후회했을 좋은 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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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3.04
  • 저작시기2009.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87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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