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카마쿠라 막부의 시대상
2. 카마쿠라 막부의 멸망
3. 카마쿠라 막부 시대의 주요 사건
4. 여몽연합군과 일본 침략
2. 카마쿠라 막부의 멸망
3. 카마쿠라 막부 시대의 주요 사건
4. 여몽연합군과 일본 침략
본문내용
이나 되었다.
그런데 강남군 전함에는 다수의 농기구등과 씨앗 등이 실렸다. 이것은 동로군이 큐슈를 점령할 경우, 남송인 들을 그곳에 정착시켜 장기적으로 영토화 할 목적으로 보인다. 따라서 2차 원정의 실질적인 핵심은 고려군이었고, 원제국군은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 고려 충렬왕 역시 이번 기회에 왜구들의 본거지를 근본적으로 소탕하려 하였기 때문에, 1차 원정 때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동로 군이 합포를 출발한 날은 1281년 5월3일이었으며 강남군과 이키도에서 6월15일 합류하기로 하였다. 동로 군이 합류 날짜보다 40여일이나 먼저 출항한 것 역시, 이들이 주력이었으며 일본 왜구의 본거지를 근본적으로 제거하려는 고려의 의지도 담겨 있었던 것이다.
대마도를 가볍게 돌파한 동로군은 1281년 5월26일 이키도에 상륙하였다. 이때 이키도의 수비대를 이끌고 있었던 사람은 19세의 쇼니 쓰케토키였다. 그러나 그가 거느린 병력은 총 100기 2~300여명 수준, 이키도에 상륙하는 동로 군을 향해 바위를 굴리고 장궁(長弓)을 쏘며 용감하게 맞서 싸웠지만, 전군은 전멸 당하였으며 그도 온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이키도를 점령한 동로 군은 10일간 휴식하고 소부대만 잔류시킨 뒤 6월6일 하카타 항으로 침입했다. 그런데 상륙정을 타고 하카타만 항으로 접근하던 동로군은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드디어 카마쿠라 막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20km의 방루가 위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상륙이 원활하지 않자 동로군은 작전을 변경, 수비가 엷다고 판단되던 시카노도(志賀島)에 상륙하였다. 특히 김방경은 6월 8일 일본군 수급 300여 급을 베는 등 분전하였지만, 홍다구는 연전연패하였고 그로인해 천여 명이나 되는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역병까지 돌아 총 사망자는 3000여 명에 육박하였다.
결국 6월6일 밤부터 8일간에 걸친 시카노도의 공방전은 일본군의 승리고 끝나고 말았다. 또 일본은 여몽연합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방어태세를 잘 갖추었기 때문에, 다른 곳의 상륙작전도 여의치 않았다. 다만 일본군의 피해역시 만만치 않은 것이어서, 강남군이 제 때에 합류하여 준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강남군은 이키도가 아닌 평호도에 보름이나 늦게 도착하였고, 그 때문에 동로군은 유리한 고지를 나두고 훨씬 서쪽에 위치한 평호도로 물러나서 강남군과 합류해야 했다. 일본군에겐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이 저절로 생긴 것이었으며 그러는 사이 시간은 계속 흘러 7월 초순을 넘고 있었다.
또한 여몽연합군은 부상자와 병자를 제외 시키고 부대를 재편성하는 동안, 계절은 태풍이 시작되는 7월 중순으로 접어들었다. 여기에 히카타 만으로 가는 전초기지인 다카도(鷹島) 를 점령하였을 때는 이미 7월27일(양력 8월19일)이었다.
다카도에 정박 중이던 4400척의 여몽선단을 향해, 일본군은 기습작전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여몽연합의 병선에 탑재되어 있는 투석기로 인해 접근조차 어려웠고 피해만 가증되었다. 결국 일본군은 그들이 선호하는 데로, 육지에서의 기습작전이나 백병전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6) 2차 침략의 종료
여몽 연합이 하카타 만을 향해 진격했을 때는 이미 음력 7월 말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조용하던 바다는 마침내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거대한 삼각파도, 곳곳의 암초, 그러나 더 큰 피해를 가져왔던 것은 병선 간의 충돌이었다. 파괴된 병선은 바다의 암초역할을 하였고 음력 7월 30일부터 윤 7월 1일 사이의 태풍은 1차 원정 때 불었던 해풍 정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위력적이었다.
단 하룻밤의 태풍으로 입은 여몽연합의 피해는 전체전력의 70% 정도에 이르렀고 사망자도 7만 여명에 육박하였다. 태풍으로 인해 이탈한 병력 중 일부는 다키도(鷹島) 등지로 귀선하는데 성공하기도 하였지만, 윤 7월 1일부터 7월 7일에 거쳐 전개된 일본군의 초토전에 의해 전멸을 면할 수 없었다. 아타하이·흔도·홍다구·김방경·범문호 등 지휘부는 침몰하지 않은 병선들을 타고 고려로 귀환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그들의 도주는 무책임한 것이었다. 일본인에게 포로로 잡힌 군사만 2~3만 명이었는데, 이들은 남송출신 중국인만을 제외하고 모두 집단 학살되고 말았다.
7) 여몽연합군의 침략이 일본에 끼친 영향
일본은 두 차례에 걸쳐 태풍으로 인해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것은 분명히 카미카제(神風)가 일어난 것이라고 여겨, 일본 조야에서 신과 부처에 대한 신앙열기가 한층 심화되었다. 이 신풍은 「일본은 신의 나라이다」라는 사상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신대에 관해 기록한 일본서기를 더욱 믿게 하였다. 이 사상은 세종 원년의 대마도 정벌을 아직까지 여몽연합군의 3차 침공이라고 생각하여 일본이 패하지 않고 신풍이 불어 그들을 퇴치하였다고 믿게 하는, 국제 감각이 결여된 국가형성의 한 가지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 사무라이 계급의 위치가 상승하게 되었고, 한반도와 대륙에 대한 적개심이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후일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침공으로 한반도 해안가가 왜구에 의해 유린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도 여몽 연합군의 일본정벌의 부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74년 1차와 1281년 2차 여몽연합의 침략은 비록 자연재해의 영향이 컸지만, 그렇다고 일본이 단지 자연재해 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재해가 불어올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였던 일본인의 결속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제국의 속국이 되는 길보다 당당하게 싸워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였던 카마쿠라 막부의 의지가 선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카마쿠라 막부 최대의 업적이 오히려 정권붕괴를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원 제국의 재침에 대비한 막대한 재정지출은 카마쿠라 막부를 가난하게 만들었고, 또 각 지역에 무장을 강화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카마쿠라 막부를 위협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세력이 많아지게 되었다.
※출처 : 야후 블로그(역사의 천존고) / 인터넷 민족 신문 / 위키피디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표정 있는 역사) /
그런데 강남군 전함에는 다수의 농기구등과 씨앗 등이 실렸다. 이것은 동로군이 큐슈를 점령할 경우, 남송인 들을 그곳에 정착시켜 장기적으로 영토화 할 목적으로 보인다. 따라서 2차 원정의 실질적인 핵심은 고려군이었고, 원제국군은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 고려 충렬왕 역시 이번 기회에 왜구들의 본거지를 근본적으로 소탕하려 하였기 때문에, 1차 원정 때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동로 군이 합포를 출발한 날은 1281년 5월3일이었으며 강남군과 이키도에서 6월15일 합류하기로 하였다. 동로 군이 합류 날짜보다 40여일이나 먼저 출항한 것 역시, 이들이 주력이었으며 일본 왜구의 본거지를 근본적으로 제거하려는 고려의 의지도 담겨 있었던 것이다.
대마도를 가볍게 돌파한 동로군은 1281년 5월26일 이키도에 상륙하였다. 이때 이키도의 수비대를 이끌고 있었던 사람은 19세의 쇼니 쓰케토키였다. 그러나 그가 거느린 병력은 총 100기 2~300여명 수준, 이키도에 상륙하는 동로 군을 향해 바위를 굴리고 장궁(長弓)을 쏘며 용감하게 맞서 싸웠지만, 전군은 전멸 당하였으며 그도 온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이키도를 점령한 동로 군은 10일간 휴식하고 소부대만 잔류시킨 뒤 6월6일 하카타 항으로 침입했다. 그런데 상륙정을 타고 하카타만 항으로 접근하던 동로군은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드디어 카마쿠라 막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20km의 방루가 위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상륙이 원활하지 않자 동로군은 작전을 변경, 수비가 엷다고 판단되던 시카노도(志賀島)에 상륙하였다. 특히 김방경은 6월 8일 일본군 수급 300여 급을 베는 등 분전하였지만, 홍다구는 연전연패하였고 그로인해 천여 명이나 되는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역병까지 돌아 총 사망자는 3000여 명에 육박하였다.
결국 6월6일 밤부터 8일간에 걸친 시카노도의 공방전은 일본군의 승리고 끝나고 말았다. 또 일본은 여몽연합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방어태세를 잘 갖추었기 때문에, 다른 곳의 상륙작전도 여의치 않았다. 다만 일본군의 피해역시 만만치 않은 것이어서, 강남군이 제 때에 합류하여 준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강남군은 이키도가 아닌 평호도에 보름이나 늦게 도착하였고, 그 때문에 동로군은 유리한 고지를 나두고 훨씬 서쪽에 위치한 평호도로 물러나서 강남군과 합류해야 했다. 일본군에겐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이 저절로 생긴 것이었으며 그러는 사이 시간은 계속 흘러 7월 초순을 넘고 있었다.
또한 여몽연합군은 부상자와 병자를 제외 시키고 부대를 재편성하는 동안, 계절은 태풍이 시작되는 7월 중순으로 접어들었다. 여기에 히카타 만으로 가는 전초기지인 다카도(鷹島) 를 점령하였을 때는 이미 7월27일(양력 8월19일)이었다.
다카도에 정박 중이던 4400척의 여몽선단을 향해, 일본군은 기습작전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여몽연합의 병선에 탑재되어 있는 투석기로 인해 접근조차 어려웠고 피해만 가증되었다. 결국 일본군은 그들이 선호하는 데로, 육지에서의 기습작전이나 백병전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6) 2차 침략의 종료
여몽 연합이 하카타 만을 향해 진격했을 때는 이미 음력 7월 말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조용하던 바다는 마침내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거대한 삼각파도, 곳곳의 암초, 그러나 더 큰 피해를 가져왔던 것은 병선 간의 충돌이었다. 파괴된 병선은 바다의 암초역할을 하였고 음력 7월 30일부터 윤 7월 1일 사이의 태풍은 1차 원정 때 불었던 해풍 정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위력적이었다.
단 하룻밤의 태풍으로 입은 여몽연합의 피해는 전체전력의 70% 정도에 이르렀고 사망자도 7만 여명에 육박하였다. 태풍으로 인해 이탈한 병력 중 일부는 다키도(鷹島) 등지로 귀선하는데 성공하기도 하였지만, 윤 7월 1일부터 7월 7일에 거쳐 전개된 일본군의 초토전에 의해 전멸을 면할 수 없었다. 아타하이·흔도·홍다구·김방경·범문호 등 지휘부는 침몰하지 않은 병선들을 타고 고려로 귀환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그들의 도주는 무책임한 것이었다. 일본인에게 포로로 잡힌 군사만 2~3만 명이었는데, 이들은 남송출신 중국인만을 제외하고 모두 집단 학살되고 말았다.
7) 여몽연합군의 침략이 일본에 끼친 영향
일본은 두 차례에 걸쳐 태풍으로 인해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것은 분명히 카미카제(神風)가 일어난 것이라고 여겨, 일본 조야에서 신과 부처에 대한 신앙열기가 한층 심화되었다. 이 신풍은 「일본은 신의 나라이다」라는 사상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신대에 관해 기록한 일본서기를 더욱 믿게 하였다. 이 사상은 세종 원년의 대마도 정벌을 아직까지 여몽연합군의 3차 침공이라고 생각하여 일본이 패하지 않고 신풍이 불어 그들을 퇴치하였다고 믿게 하는, 국제 감각이 결여된 국가형성의 한 가지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 사무라이 계급의 위치가 상승하게 되었고, 한반도와 대륙에 대한 적개심이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후일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침공으로 한반도 해안가가 왜구에 의해 유린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도 여몽 연합군의 일본정벌의 부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74년 1차와 1281년 2차 여몽연합의 침략은 비록 자연재해의 영향이 컸지만, 그렇다고 일본이 단지 자연재해 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재해가 불어올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였던 일본인의 결속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제국의 속국이 되는 길보다 당당하게 싸워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였던 카마쿠라 막부의 의지가 선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카마쿠라 막부 최대의 업적이 오히려 정권붕괴를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원 제국의 재침에 대비한 막대한 재정지출은 카마쿠라 막부를 가난하게 만들었고, 또 각 지역에 무장을 강화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카마쿠라 막부를 위협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세력이 많아지게 되었다.
※출처 : 야후 블로그(역사의 천존고) / 인터넷 민족 신문 / 위키피디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표정 있는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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