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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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사 요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된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는 콜룸부스의 세력을 제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황실의 작전은 신세계의 인디언들을 보호하는 법령을 제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왕실의 간섭을 혐오했던 이주민들이 분국에서 제정한 법령들을 신세계에서 준수하지 않는 경우가 속출했다. 그 결과 대양을 사이에 둔 스페인들이 각자의 입장들을 고집하는 가운데 인디언들은 착취당하고 살해되어갔다.
인디안들에 대한 착취를 고발한 최초의 공개적 저항은 1511년에 도미니크회 수도사 안토니오 몬테시노스가 산토 도밍고에서 행한 설교였다. 몬테시노스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 중에는 데라스 카사스가 있었다. 그는 신세계에서 성직 임명을 받은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엔코미엔다” 아래 몇 명의 인디언을 거느리고 있었다.
일종의 신탁 제도라 할 수 있을 “엔코미엔다” 체제야 말로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이 반대한 가장 중요한 착취 형태였다. 그는 1514년 오순절을 기해 크게 심령의 변화를 일으킨 후 자기 소유의 엔코미엔다를 포기하고 공개적으로 기독 신앙은 스페인인에 의한 인디던들의 착취와 공존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신세계에서의 스페인 식민정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도미니크회 수도사들 중에는 살라만카 대학교의 신학 교수인 프란치스코데 빅토리아가 있다. 페루 정복민 및 이곳에서 자행된 스페인인들의 잔혹 행위에 관한 소식을 들은 빅토리아는 과연 인디언들의 영토를 점령할 권리가 스페인인들에게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일련의 강의를 행하였다.
라스 카사스, 빅토리아, 그리고 많은 이들의 저항 운동의 중요한 결과가 1542년 찰스 5세에 의해 반포된 “서인도제도의 신법”으로 나타났다. 이 접은 인디언들에 대한 스페인인들의 권한을 제한하였으며, 스페인ㅇ니들과 평화스럽게 공존하기를 원하는 인디언들에 대한 전재 행위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 법률은 신세계에서 거의 무시되었다.
페루에서는 정착민들이 공공연히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신법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망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 전체에 걸쳐 인디언들에 대한 착취를 반대하고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중남미 기독교 신자들이 그치지 않았다.
제 11 장 포르투칼의 진출
포르투칼은 카스틸랴보다 거의 200년이나 앞선 13세기경 무어족들을 몰아내고 영토를 회복했다. 그러나 그들은 카스틸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바다를 통하여서 외부로 진출했다.
15세기 전반기에 헨리는 아프리카 서해안의 탐험을 도모했는데 그의 적극적 지원 아래, 포르투칼인들은 14차례의 시도 후에 케이프 보자도르를 통과하여 시에라 레온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탐험의 배경에는 몇가지 목적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유럽과 극동 사이의 직접적 육로를 장악하고 있던 모슬렘 교도들을 우회하여 아프리카를 통과하거나 혹은 아프리카를 해로로 돌아 동양에 도달하고자 하는 희망이었다. 또한 기독교 신자들은 기독교 왕국을 발견하여 이들과 동맹을 맺어 모슬렘 신자들을 동시에 양면에서 협공하고자 하였다.
1487년 최초의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희망봉을 통과하였다. 10년 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동해안을 따라 향해하여 인도양을 건넌 후 유럽으로 귀환함으로써 모슬렘들을 우회하여 인디아와 직접 교역하는 것이 가능함을 증명하였다.
이러한 초기 탐험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 포르투칼인들은 아프리카 해안에서 각종 종맹을 맺고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분주하였다. 1433년 콩고강 입구에 도착한 탐험대는 그 땅의 통치자 마니콩고와 동맹을 맺고 포르투칼 군대의 원조를 통해 인근 지역을 평정했다.
그러나 1572년 마니콩고는 스스로 포르투칼의 속국임을 선언하게 되었다. 콩고 남쪽에는 은골라라는 통치자의 영토가 위치하였는데 이 지역은 처음부터 노예들의 공급처로 간주되었다. 콩고에서는 마니 콩고가 노예 매매를 통솔하였고, 은골라에서는 포르투칼 상인들이 무력을 사용하여 보다 많은 이권을 차지하였다.
결국 이 해안 지방은 포르투칼의 식민지가 되었다. 포르투칼은 주로 노예들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거대한 내륙 지방을 자기의 영토로 선포하였으며, 노예 상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해안 지방으로 실어 날랐다.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 대한 포르투칼의 탐험은 이보다 더 폭력적이었다. 모잠비크에 도착하여 이곳의 주민들이 모슬렘 신자들임을 발견한 바스코 다가마는 이 도시를 포격하였다. 그는 그 후 몸바사에서도 같은 짓을 자행하였다.
모잠비크에 최초의 포르투칼 신부들이 도착한 것은 1506년이었다. 이들의 주된 임무는 아프리카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포르투칼 경비대원들을 대상으로 목회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포르투칼 신부들은 군대들의 보호 아래 해안 안 지방에 남아 있었으나, 일단의 제수잇들과 도미니크회 소속 선교사들은 내륙으로 들어갔다. 그 후 50년 동안 목숨을 바친 선교사들이 속출하였으며, 이들은 많ㅇ느 아프리카인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순교자들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들의 대부분은 아프리카인들에게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 직후, 교황은 전체 비기독교 세계를 스페인과 포르투칼에게 분배해 주었다. 포르투칼은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전체 동양을 분배받았다. 아프리카 탐험은 결국 동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중간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바스코 다가마의 탐험을 통하여 포르투칼인들은 인도, 일본, 그리고 중국 등 동양은 매우 넓고 인구가 많아서 포르투칼의 힘으로는 결코 정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정복보다는 교역의 길을 택했다.
1500년 역풍을 피하기 위해 보다 광활한 항로를 택하여 아프리카 해안을 돌아 동양을 향했던 포르투칼의 소함대는 브라질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설탕이 매우 비싸게 거래되었기 때문에 포르투칼인들은 브라질에서 사탕수수를 독점했다.
전반적으로 볼 때 브라질에 있어서의 기독교 초기 역사는 당시 다른 곳의 식민지 상태와 마찬가지고 그다지 밝은 것이 되지 못한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이 광대한 해외 제국들을 건설하고 이 곳에 로마 가톨릭교를 심었던 기간 동안에 유럽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존교 개혁이 발생하고 있었다. 루터가 용감하게 종교회의에서 찰스 5세에게 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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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10.07.07
  • 저작시기201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23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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