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과 정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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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단과 정통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요약 >

「이단과 정통」후반부

<요약 >

제 17 장. 정통의 시대

제 18 장. 경건주의와 이단

제 19 장. 계몽주의 이단

제 20 장. 부흥된 전통이냐, 정통의 부흥이냐?

제 21 장. 정통의 소생과 퇴보

본문내용

한 반동으로 발생되었지만, 정통을 회복시키려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현대 경건주의 운동은 죽은 정통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와 낭만주의와 싸워야 했다. 새로운 경건주의 운동은 감성으로 회의주의를 질리게 만든 것이었지 회의주의에 대해 학문적으로 대답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현대 부흥주의자들이 자유적이기를 거부했는지는 몰라도 정통이기에는 너무 신학적이지 못했다.
제 21 장. 정통의 소생과 퇴보
칼케돈 종교회의 신조는 451년에 정통 기독론 시대의 막을 열었다. 그 후 1500년 동안 칼케돈 신조는 주님의 인격에 관한 기독교 가르침의 기준이었다. 니케아의 삼위일체론과 칼케돈의 기독론적 정의들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구약성경의 문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장을 가장 정확하게 해석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칼케돈 신조의 필요성은 망각되며 무시 받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증거를 공식화하기 위해 기독교는 4세기의 세월을 보냈고, 공식화된 칼케돈 증거를 잃어버리는데 15세기가 더 걸렸다.
역사와 상대적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모든 인생이 진보 과정에 있다고 하는 가설들로 특징지을 수 있는 19세기 신학은 기독교 초기의 교리들을 원시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 여겼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취급하고 거부했다. 이러한 배경에 반대하여 역사주의와 상대주의를 불신임하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서 정통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들을 회복하려 했다. 이러한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 칼 바르트(Karl Barth)와 에밀 부르너(Emil Brunner)다. 자연계시에 있어서는 서로 일치하지 않지만 그들은 문화와 철학을 종교적 지식이나 영적 가치로 보려는 경향을 배격하면서 신학의 독특성과 특수한 성경의 권위성을 발견했다. 전적으로 학문의 영역에 매달리는 자유주의나 개인주의와 종교적 체험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와는 달리 바르트와 부르너의 신정통주의는 교회 중심적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죄와 죄의 결과에 대해 보다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하려는 성경적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바르트는 신약성경의 중심 내용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하려면 그리스도의 본성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바르트는 칼케돈에서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 그리고 그의 인격의 단일성을 확언하는데 많은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속성의 교류에 대해서는 개혁파적이기보다 루터파에 가까웠다. 부르너는 칼케돈 신학을 확언했다가 점차 그것으로부터 떠났다. 칼케돈의 교리적 관심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논의는 단지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을 해석하거나 해설하려는 차원에서 다루었다. 이때부터 자유주의의 물꼬가 열렸다고 볼 수 있다.
부르너의 경향은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에게 이어졌다. 20세기의 신앙부흥을 이끈 빌리 그래함(William F. Graham)이나 윌리암 브라이트(William R. Bright)는 정통 칼케돈의 입장에 서 있었지만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올바른 교리가 아니라 개인적 회심이었다. 개인을 부흥시키고 회중을 갱생시키는 점에서는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신학에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950년대 이후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은 불트만이었다. 948년에 있었던 세계 종교회의(World Council)는 믿지 않는 세계에 보다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열망에서 시작되었다. 회의의 고백은 매우 단순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인정하는 것만이 요구되었다. 불트만에 의하면 부활과 관련된 설명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직적접인 경험보다는 조작된 것이었다. 예수님은 단지 사람에 불과했으므로 그를 양자론적 이단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범 종교회의들은 서방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다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이후에는 매우 드물게 일어났다. 반종교개혁 활동은 트렌트 종교회의(1545-63)로부터 시작했으나 그 후의 종교회의는 3세기가 지난 제 1차 바티칸 종교회의(1869-70)였다. 제 1차 바티칸 종교회의는 교황의 지상권을 재확언하고, 교황의 무오설을 천명했다. 로마 가톨릭은 19세기의 도전들로부터 살아남았다. 1928년 1월 6일 교황 비오 11세는 모든 비 가톨릭 기독교인들에게 연합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가능한 방법으로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 굴복할 것을 제안했다.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의 승천교리(Assumption)를 1854년에 제정된 성모의 무죄잉태설(Immaculati Conception of Mary)에 추가했다. 원죄 없이 태어난 마리아가 승천함은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1958년에 비오 12세를 계승한 존 23세는 교회를 현대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제 2차 바티칸 종교회의(1962-65)를 개최했다. 회의는 라틴어로 드리던 미사를 자국어로 드리도록 예배 의식을 개혁했다. 성경 읽기와 연구가 고무되었고 프로테스탄트들과의 화해가 시작되었다. 보수적 프로테스탄트들과 함께 복음적 가톨릭 지도자들은 종교개혁에서 주창한 독특한 교리인 이신칭의와 성경의 권위와 같은 정통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들을 강조했다. 그러나 존 23세는 바티칸회의를 마치지 못하고 1963년에 사망했다.
그 후 진보적 입장의 신학자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자유적이고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트들과 보조를 같이하면서 수많은 변덕을 반복했다. 칼 라너(Karl Rahner), 한스 큉(Hans Kung, 쉴레벡크스(Eduard Schillibeeckx)와 같은 가톨릭 신학자들은 성경적 관점에 따라 로마 가톨릭 교회를 볼 뿐 아니라 보다 복음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큉은 이신칭의라는 프로테스탄트의 견해를 가톨릭 교회에 순응시키고 합법적으로 보았다. 1970년부터 그는 교황의 무오설을 공격할 뿐 아리라 정통 기독론의 전통적 신학적 관심들을 공격했다. 프로테스탄티즘과 같이 로마 가톨릭 신학도 정통도 이단도 아닌 새로운 종교라고 말할 정도로 멀리 나가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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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7.16
  • 저작시기2008.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2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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