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문제의 제기 : 재검토의 출발점
Ⅱ. 해무리굽완의 특질:특히 월주요의 옥벽저완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Ⅲ. 해무리굽완의 전개
Ⅳ. 이른바 ‘선해무리굽완 해무리굽완의 앞선 형식의 완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1980년데에 용인시 서리요의 발굴성과를 토대로 성립되었다. ’ 문제
Ⅴ. 해무리굽완 등을 통하여 본 한국 청자 제작의 개시시기
Ⅵ. 맺음말: 한국청자 제작의 개시시기로서의 10세기2/4분기
Ⅱ. 해무리굽완의 특질:특히 월주요의 옥벽저완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Ⅲ. 해무리굽완의 전개
Ⅳ. 이른바 ‘선해무리굽완 해무리굽완의 앞선 형식의 완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1980년데에 용인시 서리요의 발굴성과를 토대로 성립되었다. ’ 문제
Ⅴ. 해무리굽완 등을 통하여 본 한국 청자 제작의 개시시기
Ⅵ. 맺음말: 한국청자 제작의 개시시기로서의 10세기2/4분기
본문내용
이 남서부지방과 중서부지방 초기청자요가 청자와 요도구의 양상이나 번조법 그리고 요의 구조 등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지리적으로 그다지 멀리 덜어져 있지 않은 양자가 그러한 차이점을 보이는 원인은 초기청자의 전개와 관련하여 깊이 있게 검토해보아야 할 매우 중요한관제의 하나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우선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양자가 개요 관정에서 별다른 영향을 주고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양자가 월주요의 서로 다른 계통의 요의 청자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청자를 제작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양자 가운데 어느 한 쪽이 먼저 요업을 개시가도 나서 일정한 궤도에 오른 뒤 다른 한쪽이 그 영향을 받아 개요 했다면 그러한 현상은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한 현상은 무엇보다도 남서부지방과 중서부지방의 초기청자요가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에게 영향을 미칠 만한 시간적 격차가 없이 각자가 월주요의 서로 다른 계통의 청자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개요한 데에 따른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믿는다. 요컨대 남서부지방의 초기청자요도 중서부지방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10세기2/4분기 경에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Ⅵ. 맺음말: 한국청자 제작의 개시시기로서의 10세기2/4분기
10세기 2/4분기는 우리나라 역사상 일대 격변기였다. 강력한 전제왕권을 토대로 오랫동안 한반도를 지배해 온 통일신라는 하대 이후 쇠락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경상도 일대를 지배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이른바 후삼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에 한반도의 패권을 다툰 것은 후백제와 고려였다. 수십 년에 걸쳐 후백제와 고려 사이에는 후삼국의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한 국운을 건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면서 혼란의 소용돌이에 싸여 있었다. 말하자면 한반도는 동요와 분열의 시기였다. 935년과 936년에 각각 신라와 후백제가 항복함으로서 기나긴 후삼국 통일전쟁은 고려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그 혼란의 여파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극심한 혼란기에 도기 제작에 머물러 있던 우리나라에서 기술적 차원이 다른 신소재인 청자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흔히 그러한 기술의 발전은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생각되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즉, 이 시기는 지배계급의 관점에서 보면 정치적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피지배계급인 지방의 농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배계급의 총체적 수탈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활력적이었던 때렸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때는 지배계급이 모여 살던 중앙 보다는 오히려 지방사회가 에너지가 넘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청자를 제작하기 시작한 주체들이 국가가 아닌, 호족 공동체를 이끌던 호족들이었던 것은 그러한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요컨대 10세기2/4분기 경에 우리나라에서 청자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러한 지방사회의 커다란 변화 속에서 이루어 졌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은 무엇보다도 남서부지방과 중서부지방의 초기청자요가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에게 영향을 미칠 만한 시간적 격차가 없이 각자가 월주요의 서로 다른 계통의 청자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개요한 데에 따른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믿는다. 요컨대 남서부지방의 초기청자요도 중서부지방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10세기2/4분기 경에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Ⅵ. 맺음말: 한국청자 제작의 개시시기로서의 10세기2/4분기
10세기 2/4분기는 우리나라 역사상 일대 격변기였다. 강력한 전제왕권을 토대로 오랫동안 한반도를 지배해 온 통일신라는 하대 이후 쇠락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경상도 일대를 지배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이른바 후삼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에 한반도의 패권을 다툰 것은 후백제와 고려였다. 수십 년에 걸쳐 후백제와 고려 사이에는 후삼국의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한 국운을 건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면서 혼란의 소용돌이에 싸여 있었다. 말하자면 한반도는 동요와 분열의 시기였다. 935년과 936년에 각각 신라와 후백제가 항복함으로서 기나긴 후삼국 통일전쟁은 고려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그 혼란의 여파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극심한 혼란기에 도기 제작에 머물러 있던 우리나라에서 기술적 차원이 다른 신소재인 청자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흔히 그러한 기술의 발전은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생각되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즉, 이 시기는 지배계급의 관점에서 보면 정치적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피지배계급인 지방의 농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배계급의 총체적 수탈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활력적이었던 때렸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때는 지배계급이 모여 살던 중앙 보다는 오히려 지방사회가 에너지가 넘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청자를 제작하기 시작한 주체들이 국가가 아닌, 호족 공동체를 이끌던 호족들이었던 것은 그러한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요컨대 10세기2/4분기 경에 우리나라에서 청자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러한 지방사회의 커다란 변화 속에서 이루어 졌다고 믿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