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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성리학(주자학)의 의미, 성리학(주자학)의 마음관, 성리학(주자학)의 관학화, 성리학(주자학)의 수용과정, 성리학(주자학)의 영향, 성리학(주자학)과 영남성리학, 성리학(주자학)과 주자성리학, 성리학 관련 시사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성리학(주자학)의 의미

Ⅲ. 성리학(주자학)의 마음관

Ⅳ. 성리학(주자학)의 관학화

Ⅴ. 성리학(주자학)의 수용과정

Ⅵ. 성리학(주자학)의 영향
1. 장점
2. 단점

Ⅶ. 성리학(주자학)과 영남성리학

Ⅷ. 성리학(주자학)과 주자성리학

Ⅸ. 결론 및 시사점

참고문헌

본문내용

여, 우리는 앞서 최해의 「예산은자전」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 자신도 당시 관료사회의 생리에 추종하지 않고 새로운 이념으로 무장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기개와 실천력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최해의 연장선상에서 이어지는 그의 정체성 확보 노력은, 자신을 성찰적으로 바라보며 자조할 수박에 없었던 전 세대의 최해 단계를 구체적으로 뛰어넘고 있다. 정현숙 단계에서는 신흥사대부에 대한 계층적 성찰이 ⑥에서 보듯, 당시 막 실천되기 시작한 3년상을 兩親喪에서 모두 3년씩 廬墓하고 있는 신유학적인 孝의 구체적 실천으로, ⑦에서 보듯, 死地를 무릅쓰는 국가에 대한 忠의 구체적 실천으로 일상적인 삶의 수준에서 검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적 삶의 수준에서의 신유학적 이념을 구현하는 신흥사대부의 모습은 金震陽의 인물전인 李崇仁의 「草屋子傳」에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이숭인과 김진양은 둘다 이색의 門生으로서 대단히 친밀한 사이였는데, 이숭인은 이처럼 절친했던 벗 김진양의 士君子다운 풍모를 아름답게 여겨 그의 전을 지었던 듯하다. 이 작품은 서두에서 김진양의 歷官과 인물됨을 간결하게 제시하고, 중간부분에서 작자와의 친분관계를 밝힌 다음 김진양의 향리 경주에서 둘이 함께 신라의 고적을 周覽한 사실을 유려한 필치로 적고 있다
안향은 일찍이 원으로부터 신유학을 받아들이면서, 일상의 현실생활 속에서 주어진 사회관계인간관계 속에서 효도하고, 충성하고, 禮를 행하고, 信義를 베푸는 실천 속에 성인의 도가 있는 것이지, 현실을 떠난 虛無空寂한 곳에 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실제로 그의 삶은 현실을 떠난 곳에서 진리를 찾아야 하는 이원론적인 삶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믿고 신봉하는 진리로서의 신유학을 실천적으로 적용하고 검증해나가는 투쟁의 장이었다. 충렬왕 원년, 그가 상주판관으로 나갔을 때, 여자 무당 3인이 있어 妖神을 받들고 뭇사람을 유혹하여, 陜州로부터 군현을 차례로 다니면서, 그 위세가 수령을 엎드리게 할 만큼 대단하였다. 그리하여 안향이 그들을 치죄하자, 그들은 도리어 神의 말을 칭탁하여 온 마을을 협박하였고, 이에 따라 상주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다. 하지만 안향은 神의 말을 칭탁하여 禍福으로써 위협하는 상대방의 공격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움으로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러한 안향의 모습에는, “성인의 도는 현실생활 속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것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실천적 신유학의 모토가 담겨 있는데,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여기 정현숙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⑤에서 보듯, 어느 지방이 되었건, 그가 지방관이 되어서 그곳의 淫祠를 금지하고 무당을 좇는 일은, 실천적 신유학으로 무장한 한 지방관으로서의 정체성의 한 표현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④에서 보듯, 그의 불교와 권신에 대한 이러한 신유학적 삶의 실천으로 인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렀던 것인데, 그 정체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비록 육체적인 목숨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신유학으로 무장한 신흥사대부라는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에 따른 삶의 구체적 표현이 한 편으로는 ②,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신유학의 실천적 윤리 덕목의 구체적 실천으로, 또 한편으로는 ③,④,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불교와 무속과의 사상적 투쟁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은 각기 둘이 아니라, 신흥사대부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의 삶의 구현 속에 통일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Ⅸ. 결론 및 시사점
성리학은 중국에서 북송대에 일군의 학자들이 유교에 바탕하여 당시의 사회적 환경에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탐구하는 과정에 형성-발전하게 되었다. 주렴계, 소강절, 장횡거, 정명도, 정이천 등은 절충과 종합의 방식으로 기존의 유교에 도교, 불교적 요소를 결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학문체계로 성리학을 구성-발전시켰다. 이러한 성리학은 기존의 중국문화가 갖고 있는 다양한 성격들을 유교를 중심으로 재통합함으로써 정치적 통일, 문화적 결속, 사회적 안정을 기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성리학은 남송대에 주자에 의해 집대성되는 것을 계기로 유가의 학문에서 천하의 학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어 원대에 관학으로 채용됨으로써 학문적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었고, 명대 초에 관학의 교과서로서 사서오경대전과 성리대전서가 간행-반포됨에 따라 더욱 확고한 지위를 점하게 되었고, 이러한 것은 청조가 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와 함께 성리학은 원대 말에 고려로 전파되어 조선의 개국과 함께 국시로 자리하기 되었고, 동아시아사회에서 성리학적 유교문화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낳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의 성리학이 일본으로 전해져 성리학에 대한 연구와 실천을 촉발하게 되어 덕천막부의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문화변동의 전체적 관점에서 성리학적 유교문화와 근대화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이해가 기초될 때, 문화의 각 부분에서 성리학적 유교문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근대화를 촉진하거나 저해하는지 따지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을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성리학적 유교문화가 바탕하고 있는 인간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학자들은 이러한 인간관을 통상적으로 \'유교적 인본주의\'로 불러 왔으나 아직도 정확한 설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정밀한 이해가 가능하다면 동아시아문화가 어떠한 인간관에 바탕하여 근대화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것의 과정과 결과로서 그것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 금장태, 성리학의 쟁점 (1)·(2), 한국 유학의 탐구, 1999
◇ 고영진, 성리학의 연구와 보급, 한국사 28, 국사편찬위원회, 1996
◇ 벤저민 엘먼, 양휘웅 옮김, 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 예문서원, 2004
◇ 정대환 지음, 조선조 성리학 연구, 강원대학교 출판부, 1992
◇ 채상식, 성리학과 유불교체의 사상적 맥락, 역사비평 24, 역사비평사, 1997
◇ 陳來 저, 안재호 옮김, 송명성리학, 도서출판 예문서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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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05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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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63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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