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주자학]성리학(주자학)의 성격, 성리학(주자학)의 역사, 성리학(주자학)의 기본이념, 성리학(주자학)의 인물성동이론, 성리학(주자학)의 태극설, 성리학(주자학)의 내면화, 성리학(주자학)의 심화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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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성리학][주자학]성리학(주자학)의 성격, 성리학(주자학)의 역사, 성리학(주자학)의 기본이념, 성리학(주자학)의 인물성동이론, 성리학(주자학)의 태극설, 성리학(주자학)의 내면화, 성리학(주자학)의 심화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성리학(주자학)의 성격

Ⅱ. 성리학(주자학)의 역사

Ⅲ. 성리학(주자학)의 기본이념

Ⅳ. 성리학(주자학)의 인물성동이론

Ⅴ. 성리학(주자학)의 태극설

Ⅵ. 성리학(주자학)의 내면화

Ⅶ. 성리학(주자학)의 심화

참고문헌

본문내용

유교적 규범을 보편화하기 위한 계몽서들도 아울러 간행보급되어 교화에 의한 통치라는 역할을 아울러 수행하였다.
유교적 문물과 제도가 차츰 갖추어져감에 따라 성리학 자체를 이론적으로 연구할 필요성도 아울러 증가하였으며 성리학의 이해도 이에 따라 점차 심화되어 갔다. 조선초기의 성리학 이해는 性理大全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는데 宋儒의 성리설이 망라된 성리대전의 내용은 당시의 조선 유학자들에게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원래 성리대전은 明代의 사상적 통일과 통제를 위해 明初 永樂帝의 명에 의해 편집된 四書五經의 輔翼書로 송유의 대표적 저술을 시대순으로 수록하고 또 송유의 성리설을 주제별로 모아 편집한 방대한 책이다. 조선에서도 세종 때부터 성리학의 체계적 이해를 위하여 경전의 주석을 집대성한 四書大全五經大全과 더불어 성리대전을 여러 차례에 걸쳐 간행배포하고 학자들로 하여금 연구하여 강의하게 하고 있으나 성리대전의 이해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리대전은 그것이 지닌 앤솔로지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성리학의 전통이 아직 일천한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하나의 체계적인 세계관으로 정리해내기는 어려운 책이었다.
세종대 이후 성리학 연구가 부진하고 학자들의 성리학 이해가 진전되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성리대전의 이러한 성격과 여말 성리학의 학통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점, 학자들의 중국유학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사실 등을 들 수 있겠으나 이러한 이유들은 오히려 부수적인 이유라고 볼 수 있고 주된 이유로는 역시 조선전기의 역사적 상황이 성리학적 명분론에 상반된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건국 초기의 왕자의 난에서부터 유교적 명분론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世祖의 癸酉靖難에 이르러서는 성리학이라는 건국의 이념은 완전히 방기되어 버린다. 이 때문에 당시의 집권 사대부들은 성리학적 실천을 요구하는 성리학 연구보다는 실무에 도움이 되는 詞章에 보다 힘을 쓰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당시까지도 인습적으로 지속되어 오던 불교도교무격 등의 비성리학적 요소들이 부각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도전권근 이후의 여말선초의 성리학은 사장을 중심으로 한 관학에 흡수되어 師承이 단절된 채 표면에서는 차츰 소멸되어 갔고 권력의 바깥에서 비판적인 기능으로 유지되었다. 당시의 성리학 연구는 성리학적 명분을 상실한 당시의 집권층에 대한 비판과 거부였으며 성리학적 세계관의 확립은 집권사대부들의 비유교적 요소에 대한 대결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당시 성리학의 사정을 가장 여실하게 보여주는 학자가 梅月堂 金時習이다. 김시습의 사상은 佛跡儒行이라는 그의 삶의 궤적과 관련되어 儒佛調和論 혹은 儒佛道三敎調和論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그의 문집만을 놓고 본다면 儒佛의 一致 내지 調和보다도 鮮初 性理學의 繼承과 佛敎批判이 오히려 주조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시습의 성리설은 그의 太極說에서 太極과 陰陽을 동일시했고, 死生說과 鬼神說에서 생사와 귀신을 氣의 聚散과 屈伸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氣一元的 形而上學으로 볼 수 있는 소지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가 氣로써 세계를 설명하는 이유는 “太極의 道는 陰陽일 뿐이다. 일관의 도는 忠恕일 따름이다. 오직 이외에 더할 말이 없으니 나머지 말들은 모두 空寂에 빠져서 이른바 그 極을 잃은 것이 분명하다”고 한 태극설의 마지막 말이나 性卽理存心養性人心道心天理人慾의 제반 성리설을 동원하여 불교의 觀心見性說을 비판하고 있음을 볼 때 그가 적극적인 排佛論者는 아니지만 불교적 세계관의 극복과 성리학적 세계관의 확립이 그의 주된 관심사이지 기일원론 자체가 그의 성리학의 목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실제 그의 문집의 다른 부분에서는 太極과 性을 동일시하고, 性卽理를 주장하고 인을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으로 보는 등의 理學的인 측면도 발견되고 있다.
佛跡儒行 心儒跡佛로 묘사되는 方外人의 삶을 영위한 매월당의 이러한 성리학에 대해서는 조선중기 퇴계와 율곡의 엇갈린 평가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매월당의 다른 면은 일단 치지도외하고 그의 성리학에 대한 근래의 연구를 살펴보면 김시습의 성리학은 정도전권근의 主理論理氣二元論에 반대하는 主氣哲學 혹은 氣一元論으로 당시의 소외된 계층을 대변하는 사상으로 보는 견해가 상당수 있다. 조선전기의 성리학을 성리학의 수용과정으로서가 아닌 완성된 철학체계로 보면 이렇게 파악할 수도 있겠으나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했듯이 여말선초에서부터 중종 이전까지는 성리학적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유교적 가치관을 확립해 가는 과정기였다. 그러므로 정도전권근의 성리학도 뚜렷이 主理를 표방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으며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김시습의 성리학을 주기론 기일원론이라고 규정할 수도 없다. 정도전에서 김시습에 이르는 조선전기의 성리학은 말하자면 성리학적 세계관의 확립과정, 즉 송명 성리학의 이해를 심화해 가는 과정중의 한 부분들이다. 김시습의 성리학에 관한 글만을 검토해 보면 그의 성리학연구는 정도전권근의 성리학에 대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말선초의 성리학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승려로 일생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불교를 비롯한 당시의 비유교적 요소들과 대립하여 그의 氣에 입각한 세계관인간관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시습의 성리학이 지닌 이러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김시습은 당시의 정치적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南孝溫洪裕孫 등 소위 淸談派를 형성한 유학자들 및 成宗代에서부터 주자학적 명분론을 무기로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한 초기 영남사림과 개인적인 교분을 가졌고 학문적으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1. 고영진(1996), 성리학의 연구와 보급, 한국사 28, 국사편찬위원회
2. 오이환(1998), 서평: 이원명, 고려시대 성리학 수용 연구, 오늘의 동양사상 제1호(창간호), 예문동양사상연구원
3. 윤사순, 제10편 고려후기 성리학의 도입과 섭취, 한국 철학사 중, 한국철학회, 동명사
4. 이원명(1992), 고려 성리학 수용의 사상적 배경, 고려대박사학위논문
5. 유인희(1984), 퇴계·율곡 이전 조선성리학의 문제발전, 동방학지 42
6. 한국역사연구회(1992), 한국역사,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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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16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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