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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장되어야 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지위를 알았거나 눈치채고 있었다고 당연히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바울의 사도적 지위가 언급될 때, 그것은 그가 권위나 영향을 행사하고자 하는 내적 문제들과 관련한다.
만일 사도를 특별한 집단의 사람들에 대한 권세를 행사하는 자로 이해한다면, 바울은 이방인들에 대한 사도가 아니라, 대부분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들의 사도일 것이다. 외부인들과 관계에서 그는 말씀과 성령의 권능 외에 달리 어떤 고유한 권한이나 감독권을 갖고 있지 않다. 즉, 외부인들에 대해서는 말씀과 성령의 무기로 장착된 복음전도자와 선교사인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그가 사도행전에서 묘사된 방식이다. 아마도 우리는 누가에게 초기교회의 내부적 삶에 관해 더 많은 말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초점은 복음전파와 그 운동의 발전에 두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그렇게 했더라면 사도 바울에 대해 대단히 많은 정보, 아니 적어도 상당부분은 제공했으리라 생각한다.
서신 저자로서 바울을 소개하지 않은 것은 어떤가? 마찬가지의 논리가 여기서도 위와 같이 적용된다. 사도행전은 복음의 시작과 그 전파의 노력들에 관한 책이다. 바울의 서신들은 우리가 아는 한, 이미 세워진 교회들에게 보낸 것들이다. 이것은 누가가 기술하고자 하는 것의 범위 밖에 있다. 그러한 생략은 바울이 세운 교회들 안의 심화된 삶의 전개들을 기록하려 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모금(collection)의 문제로 인도한다. 왜 누가는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기금의 모금에 대해 기껏 간략히 언급하는 정도로 그칠까?(행 11:29-30) 그것은 바울 서신이 그 문제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는 것과 비교된다. 이는 로마서 15:25-28에서 바울이 얼마나 그 모금이 이방인들이 예루살렘교회에 진 은혜의 빚에 대한 표시로, 또한 아마도 바울이 점점 더 분리되어 자라고 있다고 보았던 교회의 두 집단(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화해 수단(롬 11장 참조)으로 인식하기를 염원했는지를 매우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문제에 대한 대답은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모금은 수용되었을 것이지만 이방인들에 대한 인식이나 바울이 그렇게 되기를 희망했던 화해가 일어났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에게 제공된 순전히 물질적인 부양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는 바울이 원했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만일 그랬다면, 누가가 그러한 문제들을 지나가는 길에 잠깐 언급한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품었던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지 못했다. 바울 자신이 그의 후기 서신(빌립보서, 빌레몬서)에서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사실을 주목해보라!
결국, 누가는 바울의 완전한 궤적을 그리는 초상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거나 그렇게 할 의도를 갖지 않았을 것이라고 인정해야만 한다. 그의 관심사는 전기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는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이르는 발전과정에서 활동한 역할, 즉 복음전도자, 교사, 설교자, 웅변가, 그리고 선교자로서의 역할을 역사에 남긴다. 그의 목회적 역할에 대한 언급은 아주 간략하게만 주어질 뿐이다(행 20장 참조). 만일 우리가 사도행전의 바울의 모습을 서신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에 대한 보완물이나 몇 가지 경우에 거기서 발견한 것에 대한 확증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누가의 역사적 기술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저자는 바울을 알고 있었지만 아마도 그의 서신의 많은 부분들을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다만 아시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가끔 바울의 여행 동반자였을 뿐이다. Bruce, "Paul in Acts and Letters," 680-81.
그의 대부분의 생략들은 그런 상황에서는 이해할만 하며 위에서 언급한 요인들을 고려에 넣고 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보는 바울은 비바울적이 아니며, 하물며 반바울적이지 않지만, 몇 가지 경우에서는 우리가 서신에서 듣지 못하는 바울, 어떤 경우에서는 친숙한 바울이다. 비록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찬미와 존경의 눈을 통하여 해석된 바울이다. Matill, "The Value of Acts"의 이전과 현재의 연구는 누가의 바울관을 어떻게 취하더라도 이 문제 대한 판단은 밀접하게 사도행전의 “우리” 단락의 평가와 관련됨을 명확히 하는데 여전히 유용하다.
만일 사도를 특별한 집단의 사람들에 대한 권세를 행사하는 자로 이해한다면, 바울은 이방인들에 대한 사도가 아니라, 대부분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들의 사도일 것이다. 외부인들과 관계에서 그는 말씀과 성령의 권능 외에 달리 어떤 고유한 권한이나 감독권을 갖고 있지 않다. 즉, 외부인들에 대해서는 말씀과 성령의 무기로 장착된 복음전도자와 선교사인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그가 사도행전에서 묘사된 방식이다. 아마도 우리는 누가에게 초기교회의 내부적 삶에 관해 더 많은 말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초점은 복음전파와 그 운동의 발전에 두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그렇게 했더라면 사도 바울에 대해 대단히 많은 정보, 아니 적어도 상당부분은 제공했으리라 생각한다.
서신 저자로서 바울을 소개하지 않은 것은 어떤가? 마찬가지의 논리가 여기서도 위와 같이 적용된다. 사도행전은 복음의 시작과 그 전파의 노력들에 관한 책이다. 바울의 서신들은 우리가 아는 한, 이미 세워진 교회들에게 보낸 것들이다. 이것은 누가가 기술하고자 하는 것의 범위 밖에 있다. 그러한 생략은 바울이 세운 교회들 안의 심화된 삶의 전개들을 기록하려 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모금(collection)의 문제로 인도한다. 왜 누가는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기금의 모금에 대해 기껏 간략히 언급하는 정도로 그칠까?(행 11:29-30) 그것은 바울 서신이 그 문제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는 것과 비교된다. 이는 로마서 15:25-28에서 바울이 얼마나 그 모금이 이방인들이 예루살렘교회에 진 은혜의 빚에 대한 표시로, 또한 아마도 바울이 점점 더 분리되어 자라고 있다고 보았던 교회의 두 집단(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화해 수단(롬 11장 참조)으로 인식하기를 염원했는지를 매우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문제에 대한 대답은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모금은 수용되었을 것이지만 이방인들에 대한 인식이나 바울이 그렇게 되기를 희망했던 화해가 일어났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에게 제공된 순전히 물질적인 부양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는 바울이 원했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만일 그랬다면, 누가가 그러한 문제들을 지나가는 길에 잠깐 언급한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품었던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지 못했다. 바울 자신이 그의 후기 서신(빌립보서, 빌레몬서)에서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사실을 주목해보라!
결국, 누가는 바울의 완전한 궤적을 그리는 초상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거나 그렇게 할 의도를 갖지 않았을 것이라고 인정해야만 한다. 그의 관심사는 전기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는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이르는 발전과정에서 활동한 역할, 즉 복음전도자, 교사, 설교자, 웅변가, 그리고 선교자로서의 역할을 역사에 남긴다. 그의 목회적 역할에 대한 언급은 아주 간략하게만 주어질 뿐이다(행 20장 참조). 만일 우리가 사도행전의 바울의 모습을 서신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에 대한 보완물이나 몇 가지 경우에 거기서 발견한 것에 대한 확증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누가의 역사적 기술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저자는 바울을 알고 있었지만 아마도 그의 서신의 많은 부분들을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다만 아시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가끔 바울의 여행 동반자였을 뿐이다. Bruce, "Paul in Acts and Letters," 680-81.
그의 대부분의 생략들은 그런 상황에서는 이해할만 하며 위에서 언급한 요인들을 고려에 넣고 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보는 바울은 비바울적이 아니며, 하물며 반바울적이지 않지만, 몇 가지 경우에서는 우리가 서신에서 듣지 못하는 바울, 어떤 경우에서는 친숙한 바울이다. 비록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찬미와 존경의 눈을 통하여 해석된 바울이다. Matill, "The Value of Acts"의 이전과 현재의 연구는 누가의 바울관을 어떻게 취하더라도 이 문제 대한 판단은 밀접하게 사도행전의 “우리” 단락의 평가와 관련됨을 명확히 하는데 여전히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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