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설(序說)
1. 저술 연대
2. 저술 장소
3. 마태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결어(結語)
사례 연구
1. 저술 연대
2. 저술 장소
3. 마태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결어(結語)
사례 연구
본문내용
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마가가 아닌 마태가 더 친근감 있게 느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태의 예수는 온화하면서도 위엄 있고, 구제하는데 한계가 없었듯이 끝없는 요구를 했고, 유대인들을 사랑했던 것처럼 이방인들도 사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태의 예수는 임마누엘인데 그것을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바로 부활하신 그 창조주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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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연구: 마 8:5-13
마태 1장의 예수의 족보와 많은 예수의 가르침(5-7, 10, 13, 18, 24-25장)은 마가나 누가와 다른 맥락을 제공한다. 예수의 기원과 그의 탄생에 대한 비밀은 족보를 통해 드러나지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1:1)라는 선언은 유대인들과 함께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비밀을 담고 있다. 다말, 라합, 룻으로 이어지는 이방 여성들의 심상치 않은 등장(1:3, 5)은 하나님의 광대한 구원 계획을 알려주는데, 본문은 이런 차원에서 해석된다.
예수의 권위에 대한 백부장의 절대적 신뢰
5절에는 가버나움이라는 지명과 백부장이라는 직책이 나오는데, 가버나움은 빌립이 통치하는 지역과 아주 밀접한 도시로서 헤롯 안티파스가 자신의 영토를 수비하기 위해서 비 유대인들로 구성된 군대를 주둔시켜놓은 곳이다. 그래서 이 백부장은 이방인을 대표한다(10절).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통 받고 있어서 예수에게 치료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가 예수를 ‘주여’(6절)라고 부른 것은 기독론적인 고백보다는 오히려 치료해줄 것을 애타게 바라면서 그를 어떤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8절)라는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의 신적 능력을 분명히 신뢰하는 표현이다. 백부장의 예수에 대한 인식은 이렇게 점점 강하게(crescendo) 드러나고 있다.
본문 해석의 가장 중요한 마디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절)는 예수의 간단한 답변과 관련되는데, 이것이 ‘예수의 약속’인가 아니면 ‘질문’인가? 헬라어 사본에는 구두점에 없으므로 해석의 문제가 야기된다. 7절을 예수의 약속으로 해석한다면 큰 문제는 없다. 그렇지만, 이 구절을 질문으로 본다면 크게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유대인인 내가 굳이 이방인의 집에 까지 들어가서 부정하게 되면서까지 그를 고쳐주란 말인가?’ 다른 하나는 6절에서 백부장의 공식 요청이 없는 것을 고려할 때 ‘그럼 내가 가서 치료해 주어야 한단 말인가?’ 독자들은 어느 것을 선호할지 궁금하다. 그러나 어쩔 줄 모르는 백부장의 행동을 고려할 때(8절), 둘째 질문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왜냐하면 본문은 민족적인 우월성을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차별성도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다(11-12절).
백부장의 믿음에 대한 예수의 극찬
8절에서는 백부장의 예수의 권위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베어 있다. 최고의 권위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다만 말씀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신분에 대한 언급(9절)은 예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10절에서 예수는 그의 믿음에 대하여 놀라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놀라는 것은 백부장의 믿음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12절의 ‘그 나라의 자손들’이 유대인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11절은 이방인들에 대한 예수의 축복으로 이해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천국에서 앉는 행위(make to recline at table, 식탁에 기대어 눕다)는 천상에서 배설될 종말론적 메시아 잔치다. 즉 예수는 유대인들만의 특권을 이방인들이 함께 차지하게 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의 민족적인 선입견과 차별성을 분명히 거부한다. 단순한 개종이나 합석이 아니라 족장들의 자격을 이방인들이 공유할 것이라는 예수의 선언은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언어인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본문에서 믿음은 예수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확신에 근거, 그의 치유 능력을 실제로 신뢰하는 행위이며, 그리스도인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 주님 안에서 실천하는 기도하는 믿음이며, 주님의 행동하는 능력을 깨닫는 것을 지시한다. 예수는 이런 믿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하는 유대인들에서는 찾지 못하고 오히려 주변부에서 발견한다. 즉 이방인들에게서 진정한 믿음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입장은 혹시 유대인들과 동일하지 않은지, 불신앙이 유행하는 괴질처럼 교회로 전염될 것을 경계할 시점에 도달했음을 인식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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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연구: 마 8:5-13
마태 1장의 예수의 족보와 많은 예수의 가르침(5-7, 10, 13, 18, 24-25장)은 마가나 누가와 다른 맥락을 제공한다. 예수의 기원과 그의 탄생에 대한 비밀은 족보를 통해 드러나지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1:1)라는 선언은 유대인들과 함께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비밀을 담고 있다. 다말, 라합, 룻으로 이어지는 이방 여성들의 심상치 않은 등장(1:3, 5)은 하나님의 광대한 구원 계획을 알려주는데, 본문은 이런 차원에서 해석된다.
예수의 권위에 대한 백부장의 절대적 신뢰
5절에는 가버나움이라는 지명과 백부장이라는 직책이 나오는데, 가버나움은 빌립이 통치하는 지역과 아주 밀접한 도시로서 헤롯 안티파스가 자신의 영토를 수비하기 위해서 비 유대인들로 구성된 군대를 주둔시켜놓은 곳이다. 그래서 이 백부장은 이방인을 대표한다(10절).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통 받고 있어서 예수에게 치료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가 예수를 ‘주여’(6절)라고 부른 것은 기독론적인 고백보다는 오히려 치료해줄 것을 애타게 바라면서 그를 어떤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8절)라는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의 신적 능력을 분명히 신뢰하는 표현이다. 백부장의 예수에 대한 인식은 이렇게 점점 강하게(crescendo) 드러나고 있다.
본문 해석의 가장 중요한 마디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절)는 예수의 간단한 답변과 관련되는데, 이것이 ‘예수의 약속’인가 아니면 ‘질문’인가? 헬라어 사본에는 구두점에 없으므로 해석의 문제가 야기된다. 7절을 예수의 약속으로 해석한다면 큰 문제는 없다. 그렇지만, 이 구절을 질문으로 본다면 크게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유대인인 내가 굳이 이방인의 집에 까지 들어가서 부정하게 되면서까지 그를 고쳐주란 말인가?’ 다른 하나는 6절에서 백부장의 공식 요청이 없는 것을 고려할 때 ‘그럼 내가 가서 치료해 주어야 한단 말인가?’ 독자들은 어느 것을 선호할지 궁금하다. 그러나 어쩔 줄 모르는 백부장의 행동을 고려할 때(8절), 둘째 질문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왜냐하면 본문은 민족적인 우월성을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차별성도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다(11-12절).
백부장의 믿음에 대한 예수의 극찬
8절에서는 백부장의 예수의 권위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베어 있다. 최고의 권위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다만 말씀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신분에 대한 언급(9절)은 예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10절에서 예수는 그의 믿음에 대하여 놀라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놀라는 것은 백부장의 믿음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12절의 ‘그 나라의 자손들’이 유대인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11절은 이방인들에 대한 예수의 축복으로 이해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천국에서 앉는 행위(make to recline at table, 식탁에 기대어 눕다)는 천상에서 배설될 종말론적 메시아 잔치다. 즉 예수는 유대인들만의 특권을 이방인들이 함께 차지하게 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의 민족적인 선입견과 차별성을 분명히 거부한다. 단순한 개종이나 합석이 아니라 족장들의 자격을 이방인들이 공유할 것이라는 예수의 선언은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언어인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본문에서 믿음은 예수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확신에 근거, 그의 치유 능력을 실제로 신뢰하는 행위이며, 그리스도인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 주님 안에서 실천하는 기도하는 믿음이며, 주님의 행동하는 능력을 깨닫는 것을 지시한다. 예수는 이런 믿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하는 유대인들에서는 찾지 못하고 오히려 주변부에서 발견한다. 즉 이방인들에게서 진정한 믿음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입장은 혹시 유대인들과 동일하지 않은지, 불신앙이 유행하는 괴질처럼 교회로 전염될 것을 경계할 시점에 도달했음을 인식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