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민족의 수난처 서대문 형무소
2. 서대문 형무소의 역사
3. 일본의 감옥제도
4. 신식 감옥제도
5.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1) 옥사배치도 및 현황
2) 서대문 형무소 돌아보기
3) 서대문 형무소를 다녀와서
6. 친일파 문제연구의 필요성과 그 성격
1)연구의 필요성(당위성)
2) 연구의 성격(의의)
3) 사전적 의미의 친일파
4)친일파의 개념과 연구 상황
5) 친일파의 행적
6) 국어교과서 내의 친일 문학
7) 검거 또는 시형 판결을 받은 자들의 반민족 행위
8) 친일파
7. 친일파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
8.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에 대한 자료들
*참고문헌 ;
2. 서대문 형무소의 역사
3. 일본의 감옥제도
4. 신식 감옥제도
5.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1) 옥사배치도 및 현황
2) 서대문 형무소 돌아보기
3) 서대문 형무소를 다녀와서
6. 친일파 문제연구의 필요성과 그 성격
1)연구의 필요성(당위성)
2) 연구의 성격(의의)
3) 사전적 의미의 친일파
4)친일파의 개념과 연구 상황
5) 친일파의 행적
6) 국어교과서 내의 친일 문학
7) 검거 또는 시형 판결을 받은 자들의 반민족 행위
8) 친일파
7. 친일파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
8.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에 대한 자료들
*참고문헌 ;
본문내용
바로 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해방 이후 친일파의 척결에 실패했다. 우리나라는 봉건사회의 해체과정에서 주체적으로 근대사회로 가지 못하고 제국주의의 침입을 받아 식민지로 전락해 버렸다. 식민통치자들은 봉건지배 세력과 일부의 개화세력들을 식민통치의 기반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따라서 지주와 부르주아들은 일제의 가장 중요한 통치 기반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이에 더하여 교활한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은 친일 주구배들을 양산했던 것이다. 특히 장기간의 식민통치는 친일민족반역자들의 사회경제적인 기반을 공고하게 했다.
일제 통치의 뒤를 이어 우리 민족의 일부를 통치하게 되는 미군정도 일제의 통치기반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으며, 친일민족반역자들은 비자주적인 독재권력과 결탁해서 비민주적인 사회의 토대를 구조적으로 지속시켰던 것이다.
때문에 시민사회의 경험을 공유하지 못했던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이루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로 일제하의 친일민족반역자의 청산문제가 제기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뒤 반민족의 범죄와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나라 가운데 부끄럽게도 우리나라가 끼어 있다. 행정산업군사부문을 비롯하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관료주의의 병폐도 실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 친일파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파는 우리 역사의 오산이라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잘못된 역 사를 시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따라서 올바른 규정을 가지고 친일파 목록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규정
이 매우 애매모호하다.
국권피탈에 적극 협력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의원이 된 자는 최고 무기징역 최하 5년 이상의 징역,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을 살상·박해한 자는 무기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징역,
직·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재산몰수
여기서 ‘국권피탈에 적극 협력한 자’와 ‘직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지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우선 국민들에게 전적인 신뢰감을 받고 있던 정치가나 교수 등의 사회적 지도자 위치에 있던 자들이 일제의 침략행위를 변호하고 일본 정부의 뜻대로 국민들을 설득, 교육시켰다면 이들은 친일이라는 의견에는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또한 지주 계층으로써 자신의 재산을 위해 친일을 옹호했다면 이도 또한 친일이라는 의견에도 모두 동의했다. 이들은 사회 내에서 일반 서민들보다 사회적 지위가 있었으므로 그만큼 그들이 한 행위의 효과는 일반 서민이 한 행위보다 파급효과가 크므로 그들이 자신의 행위를 후에 뉘우쳤다 해도 명백한 친일 행적이 발견됐다면 이는 처 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계수단을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친일행위부분에선 의견이 나뉘어졌다. 하나의 예로
순사를 얘기했는데, 상관의 명령이고, 자신의 목숨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이는 친일이 아
니라는 의견과 자의든 타의든 이것은 사람의 의도가 중요한 요인이 되는데 이것은 너무나 주관적인
기준이므로 그것을 중요 요인으로 한다면 기준 자체가 흔들리므로 객관적인 요소인 그의 행위를 기준
으로 우리나라와 국민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면 친일이라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자의든 타의든 친일을 정당화 시켰다면 그 행위 자체도 독립을 방해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친일이라는 강경한 의견도 있었다. 이 문제는 위에 쓴 대로 그 사람의 의도가 가장 주요한 요인이 되므로 정확한 선을 긋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졌다.
시인 서정주 시인의 얘기도 나왔다. 시인 서정주는 우리가 중고등학교 국어, 문학 시간에 배운 아름
다운 시를 쓴 대표적인 시인이다. 하지만 우리가 중고등학교 국어, 문학 시간을 돌이켜봤을 때 그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들을 수가 없었다. 이소희 학우는 국문과 수업 시간 중에 서정주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발표자는 서정주는 우리나라 문학계를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명으로 그는 아
름다운 시를 썼기에 그의 친일 행위는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비췄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는 이것이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에는 동의를 했다. 하지만 그의 문학작품들을 배워야 할 것인가
에 대해서는 조금 엇갈린 의견이 나왔다. 그들의 문학적 기여는 문학적 기여로써 인정하고 그의 친일
행위는 또한 친일 행위로써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문학적 기여를 인정하기에 그의 시 또한 배워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시. 즉 문학 작품 속에는 그 사람의 사상이 결집된 결합체로서
우리가 한 문학작품을 공부할 땐 그 문학작품만이 아닌 문학가의 사상까지도 배우게 된다는 의견이었 다. 친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무리 아름다운 시를 썼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실된 글이 아닌 하나의
기교에 그치지 않다는 의견이었다. 우리의 중고등학교의 국어, 문학교육 속에서의 친일 문학가들의 작 품은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는 그들의 아름다운 면만을 기억하고 있다. 서정 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는 기억하지만 그가 쓴 친일 작품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더라도 그의 아름다운 면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한국인이라면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의 뿌리, 우리의 모습을 모른다면 우리는
한국인일 수 있는 것일까? 역사는 하나의 과목, 하나의 학문이 아닌 우리의 생활이요 우리이다. 우리
우리이기 위해 깨어있자. 올바른 의식으로 판단하고 올바른 눈으로 바라보자. 그것이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힘이다.
8.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에 대한 자료들
한나라당의 입장을 알아보고자 한나라당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갔으나 이와 관련된 자료들은 없었다.
한 쪽으로 치우친 듯 한 인상이지만 찾아본 자료엔 한 입장이 주로 나타나 있었다.
*참고문헌 ; http://bluecabin.com.ne.kr/split99/
http://seodaemun.seoul.kr/theme/prison/prison.php
서대문 형무소 근현대사 / 김상웅 / 나남 / 2000.2.1
일제 통치의 뒤를 이어 우리 민족의 일부를 통치하게 되는 미군정도 일제의 통치기반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으며, 친일민족반역자들은 비자주적인 독재권력과 결탁해서 비민주적인 사회의 토대를 구조적으로 지속시켰던 것이다.
때문에 시민사회의 경험을 공유하지 못했던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이루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로 일제하의 친일민족반역자의 청산문제가 제기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뒤 반민족의 범죄와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나라 가운데 부끄럽게도 우리나라가 끼어 있다. 행정산업군사부문을 비롯하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관료주의의 병폐도 실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 친일파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파는 우리 역사의 오산이라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잘못된 역 사를 시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따라서 올바른 규정을 가지고 친일파 목록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규정
이 매우 애매모호하다.
국권피탈에 적극 협력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의원이 된 자는 최고 무기징역 최하 5년 이상의 징역,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을 살상·박해한 자는 무기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징역,
직·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재산몰수
여기서 ‘국권피탈에 적극 협력한 자’와 ‘직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지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우선 국민들에게 전적인 신뢰감을 받고 있던 정치가나 교수 등의 사회적 지도자 위치에 있던 자들이 일제의 침략행위를 변호하고 일본 정부의 뜻대로 국민들을 설득, 교육시켰다면 이들은 친일이라는 의견에는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또한 지주 계층으로써 자신의 재산을 위해 친일을 옹호했다면 이도 또한 친일이라는 의견에도 모두 동의했다. 이들은 사회 내에서 일반 서민들보다 사회적 지위가 있었으므로 그만큼 그들이 한 행위의 효과는 일반 서민이 한 행위보다 파급효과가 크므로 그들이 자신의 행위를 후에 뉘우쳤다 해도 명백한 친일 행적이 발견됐다면 이는 처 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계수단을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친일행위부분에선 의견이 나뉘어졌다. 하나의 예로
순사를 얘기했는데, 상관의 명령이고, 자신의 목숨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이는 친일이 아
니라는 의견과 자의든 타의든 이것은 사람의 의도가 중요한 요인이 되는데 이것은 너무나 주관적인
기준이므로 그것을 중요 요인으로 한다면 기준 자체가 흔들리므로 객관적인 요소인 그의 행위를 기준
으로 우리나라와 국민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면 친일이라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자의든 타의든 친일을 정당화 시켰다면 그 행위 자체도 독립을 방해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친일이라는 강경한 의견도 있었다. 이 문제는 위에 쓴 대로 그 사람의 의도가 가장 주요한 요인이 되므로 정확한 선을 긋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졌다.
시인 서정주 시인의 얘기도 나왔다. 시인 서정주는 우리가 중고등학교 국어, 문학 시간에 배운 아름
다운 시를 쓴 대표적인 시인이다. 하지만 우리가 중고등학교 국어, 문학 시간을 돌이켜봤을 때 그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들을 수가 없었다. 이소희 학우는 국문과 수업 시간 중에 서정주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발표자는 서정주는 우리나라 문학계를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명으로 그는 아
름다운 시를 썼기에 그의 친일 행위는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비췄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는 이것이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에는 동의를 했다. 하지만 그의 문학작품들을 배워야 할 것인가
에 대해서는 조금 엇갈린 의견이 나왔다. 그들의 문학적 기여는 문학적 기여로써 인정하고 그의 친일
행위는 또한 친일 행위로써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문학적 기여를 인정하기에 그의 시 또한 배워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시. 즉 문학 작품 속에는 그 사람의 사상이 결집된 결합체로서
우리가 한 문학작품을 공부할 땐 그 문학작품만이 아닌 문학가의 사상까지도 배우게 된다는 의견이었 다. 친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무리 아름다운 시를 썼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실된 글이 아닌 하나의
기교에 그치지 않다는 의견이었다. 우리의 중고등학교의 국어, 문학교육 속에서의 친일 문학가들의 작 품은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는 그들의 아름다운 면만을 기억하고 있다. 서정 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는 기억하지만 그가 쓴 친일 작품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더라도 그의 아름다운 면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한국인이라면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의 뿌리, 우리의 모습을 모른다면 우리는
한국인일 수 있는 것일까? 역사는 하나의 과목, 하나의 학문이 아닌 우리의 생활이요 우리이다. 우리
우리이기 위해 깨어있자. 올바른 의식으로 판단하고 올바른 눈으로 바라보자. 그것이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힘이다.
8.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에 대한 자료들
한나라당의 입장을 알아보고자 한나라당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갔으나 이와 관련된 자료들은 없었다.
한 쪽으로 치우친 듯 한 인상이지만 찾아본 자료엔 한 입장이 주로 나타나 있었다.
*참고문헌 ; http://bluecabin.com.ne.kr/split99/
http://seodaemun.seoul.kr/theme/prison/prison.php
서대문 형무소 근현대사 / 김상웅 / 나남 / 20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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