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본론
1.랑케의 역사관
2.랑케사학의 특징
3.랑케가 말하는 역사의 본질
4.랑케의 생애의 목표
5.기본 신념
6.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철저한 사실존중주의자이다
7.최초로 국가와 정치세력을 하나의 개체성으로 관찰
8.역사는 이미 정해진 일정한 목표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니다.
9.랑케는 역사에 있어서 성공을 믿고 있었다.
10.역사에 있어서 우연을 인정했다.
11.랑케가 말하는 역사가의 임무
12.랑케의 결점
Ⅲ.결론
Ⅱ.본론
1.랑케의 역사관
2.랑케사학의 특징
3.랑케가 말하는 역사의 본질
4.랑케의 생애의 목표
5.기본 신념
6.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철저한 사실존중주의자이다
7.최초로 국가와 정치세력을 하나의 개체성으로 관찰
8.역사는 이미 정해진 일정한 목표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니다.
9.랑케는 역사에 있어서 성공을 믿고 있었다.
10.역사에 있어서 우연을 인정했다.
11.랑케가 말하는 역사가의 임무
12.랑케의 결점
Ⅲ.결론
본문내용
로 나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그가 미래전망을 결여하고 있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로 그의 미래전망은 모호했고, 그것은 그의 역사사고에서 별다른 작용을 하지 못했다.
랑케에 대해서는 그의 당대에서뿐만 아니라 후시대에서도 적지 않은 비판이 있었다. 민족주의자들은 그의 세계시민적 태도를 비판했고, 도덕주의자들은 그의 논리적 중도주의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런가하면 물질주의자들은 그의 애매한 초월주의를 비난했다. 물론 랑케가 초현실적, 세계 시민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전혀 자신의 민족적, 국가적 현실로부터 벗어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당시대의 산물이었다. 그가 비록 당대의 소용돌이로부터 초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나 그는 역시 프러시아 군주제의 충복으로서 국가와 교회의 변호자였다. 말하자면 그 자신이 이미 자신의 주관적 견해 속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가 대중을 거의 관심밖에 두었던 것은 그가 군주제를 신봉했던 만큼이나 기존하는 보수적 정치사상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는 ‘역사적인 것’과 ‘정통적인 것’이. 또 ‘비역사적인 것’과 ‘혁명적인 것’이 각각 동일시되는 면이 있었다. 이것은 그가, 후일의 지벨이 지적했듯이, ‘윤리적 분노’의 감정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상의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랑케도 역시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가 다음 세대들에게 마치 자기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했던 것처럼 믿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도의 균형을 유지할 줄 알았고, 현실로부터 초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Ⅲ.결론
위에서 살펴봤듯이 역사가의 임무에 대해서 랑케는 먼저, 비판적인 입장에서 역사적 사실을 편찬하는 일과 다시 이것을 역사적 과정의 단일성 속에서 재구성하는 일을 들었다. 그리고 역사연구의 목표는 사건의 중요한 시기의 연구와 보편적 관계의 연구라고 표현하였는데 이 일반적 관계의 인식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감정과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했다. 이것으로서 랑케는 단순히 무엇이 일어났는지 만을 아는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정말 사실이 어떠했는가를 알려고 하였으며 이것은 결론적으로 전체사적 과정의 모습을 역사주의의 입장에서 고찰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랑케의 사학은 개별적인 것에 대한 강조를 그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각국의 문서보존소를 탐색하였으며 세미나를 통해 후진학자들을 양성하였다. 랑케에 있어서 정치발전이란 곧 신의 섭리가 표현된 것이며 역사란 도덕적 운명을 달성하는 국가의 역사이다. 그의 사관에 의하면 세상의 실재하는 사물들의 배경에 실체의 세계가 존재하며 이는 인간에게는 직접적으로 알 수 없는 발전법칙을 지닌다는 것이다. 결국 랑케에게 있어서의 역사지식이란 창조적 의지로서의 역사를 파악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랑케는 사실 중심적 역사를 실천했지만 동시에 관념론적인 보편사관을 지닌 사학자였던 것이다.
랑케에 대해서는 그의 당대에서뿐만 아니라 후시대에서도 적지 않은 비판이 있었다. 민족주의자들은 그의 세계시민적 태도를 비판했고, 도덕주의자들은 그의 논리적 중도주의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런가하면 물질주의자들은 그의 애매한 초월주의를 비난했다. 물론 랑케가 초현실적, 세계 시민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전혀 자신의 민족적, 국가적 현실로부터 벗어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당시대의 산물이었다. 그가 비록 당대의 소용돌이로부터 초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나 그는 역시 프러시아 군주제의 충복으로서 국가와 교회의 변호자였다. 말하자면 그 자신이 이미 자신의 주관적 견해 속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가 대중을 거의 관심밖에 두었던 것은 그가 군주제를 신봉했던 만큼이나 기존하는 보수적 정치사상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는 ‘역사적인 것’과 ‘정통적인 것’이. 또 ‘비역사적인 것’과 ‘혁명적인 것’이 각각 동일시되는 면이 있었다. 이것은 그가, 후일의 지벨이 지적했듯이, ‘윤리적 분노’의 감정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상의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랑케도 역시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가 다음 세대들에게 마치 자기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했던 것처럼 믿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도의 균형을 유지할 줄 알았고, 현실로부터 초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Ⅲ.결론
위에서 살펴봤듯이 역사가의 임무에 대해서 랑케는 먼저, 비판적인 입장에서 역사적 사실을 편찬하는 일과 다시 이것을 역사적 과정의 단일성 속에서 재구성하는 일을 들었다. 그리고 역사연구의 목표는 사건의 중요한 시기의 연구와 보편적 관계의 연구라고 표현하였는데 이 일반적 관계의 인식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감정과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했다. 이것으로서 랑케는 단순히 무엇이 일어났는지 만을 아는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정말 사실이 어떠했는가를 알려고 하였으며 이것은 결론적으로 전체사적 과정의 모습을 역사주의의 입장에서 고찰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랑케의 사학은 개별적인 것에 대한 강조를 그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각국의 문서보존소를 탐색하였으며 세미나를 통해 후진학자들을 양성하였다. 랑케에 있어서 정치발전이란 곧 신의 섭리가 표현된 것이며 역사란 도덕적 운명을 달성하는 국가의 역사이다. 그의 사관에 의하면 세상의 실재하는 사물들의 배경에 실체의 세계가 존재하며 이는 인간에게는 직접적으로 알 수 없는 발전법칙을 지닌다는 것이다. 결국 랑케에게 있어서의 역사지식이란 창조적 의지로서의 역사를 파악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랑케는 사실 중심적 역사를 실천했지만 동시에 관념론적인 보편사관을 지닌 사학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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