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논지파악 및 자신의 의견
내용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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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가지의 커다란 숙제가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를 말하자면, 그 하나는 교육적 비젼의 결여요, 또 하나는 사회적 비젼의 결여다. 그 첫째 교육적 비젼의 결여란 일차적으로 승려의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또 그러한 방면으로 한국불교가 힘쓰고 있질 않다는 것이다. …… 둘째, 사회적 비젼의 결여라 함은 불교를, 부처님의 말씀을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집단의 교리체계나 아이덴티티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좁은 종파적 의식을 떠나 불교가 과연 오늘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떠한 사회적 가치를 지닐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확고한 비젼을 불교계의 리더들이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땅의 기독교의 경우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세계에서 천주교를 스스로 받아들여 스스로의 손으로 교회를 세우고 그 후에 서양선교사를 초청한 특이한 체험을 한 민족이 우리민족이다. 토인비는 후진국에서 서양문화를 처음 받아 들일때는 군사학과 의학부터 먼저 받아들인다고 했는데 한국인은 종교부터 시작한 것이다. 어쨋든 이 땅에 들어온 기독교의 오늘의 모습도 파가 갈라져 있는 것은 구교와 신교만도, 신교 쪽의 ‘예장’과 ‘기장’만도 아니다. 실로 수많은 분파가 있고, 그들 사이는 더러는 앙숙과 같다. 예수정신의 정수는 아무래도 사랑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기독교 문화권이 아니면서도 기독교가 세계에서 가장 성한 것으로 유명한 우리나라는 교회 내 분파가 많기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특히 한국에서는 기독교의 신도수가 엄청나게 늘었다. 근대화를 빠른속도로 치러낸 사회에서는 전통종교가 근대화의 요청에 제대로 적응할 만한 여유를 갖지 못해 그 침투여지와 확산속도가 큰 것이다.
지난 92년 10월 3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 교황청 아카데미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3백60여년전 교황청이 갈릴레오에게 내린 선고가 잘못이었다고 인정했다. 교황의 이같은 언급은 교회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은 한 인간에 대한 복권이자 사죄였다. 1633년 로마 종교재판소에 소환된 70세의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부정하라고 강요받았다. 갈릴레오는 “과거의 잘못을 맹세코 포기하며 저주하고 혐오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목숨을 구했지만, 그 뒤 78세로 죽을 때까지 자택에 연금됐다. 종교재판의 마지막 대목에서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또한 중세시대에, 교회는 절대적이었다. 교회의 권한은 세속에까지 확대, 교회가 모든 것을 지배했다. 이 무렵 교회가 벌인 주요 사업 중 하나가 면죄부 판매와 이단추방이었다. 종교개혁 전 당시 교회에서는 면죄부 판매를 독려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사는 돈이 돈상자 속에 땡그랑 소리를 내고 떨어지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난다고 하였으며 죽은 자도 해당이 되었다. 이를 위해 종교재판이란 무시무시한 장치가 마련되어 숫한 사람들이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고문과 화형에 처해졌다.
로마 교황청은 오는 2000년 대희년을 맞아 교회가 안고 있는 과거의 ‘괴로운 유산’을 청산하는 사업을 추진중이다. 그중 하나로 98년초 종교재판 관련기록을 공개했으며, 최근 종교재판에 대해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 위한 심포지엄을 갖는 등 과거의 잘못을 참회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새로운 천년을 맞아 새롭게 태어나려는 교회의 모습을 본다.
우리 종교문화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를 느낀다. 수천 년 동안 우리 의식의 심층부에 의연히 도사린 채 민간 사상의 저류를 형성해 온 것은 다름아닌 원시종교적 샤머니즘인데도 이것이 정통의 지위를 누려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역대에 사사으이 정통으로 인정받고권위를 누린 것은 대개 불교와 유교 같은 그 당시 세계의 보편주의라 할 수 있는 사상을 정권의 공인아래 수용 채택된 외래의 종교 사상이었다.
한편 94년초 테러로 생을 마감한 탁명환씨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의 신흥 종교수는 350여개, 신도수는 2백만명에 달하는데 이중 20%는 사이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단느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신흥종교자체를 좋다 나쁘다로 구분하긴 곤란하다. 다만 개인과 사회적 질서를 부넝, 파괴하는 종교적 이단성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문화가 번성했다는 것은 난세였다는 것을 뜻한다. 각 종교의 창시자들은 당시 살았던 사회조직의 원리들을 반대했다는 것은 이상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은 모두 그 시대의 이해와 권력에 대항하여 싸웠던 반역자이자 혁명가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반역성이 그들의 성공을 설명하는 것은 아닐까. 세계적 종교의 발상지는 어김없이 생존 조건이 핍박했던 곳이라는 것부터 그렇다. 그것은 그 당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웠던 것을 반증한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값싼 아편’이라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현세가 핍박할수록 내세에 대한 기원은 간절해질 수밖에 없고, 현세의 치자가 무서울수록 내세의 신은 더 거룩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 쪽에서 보기로 할 때, 오늘 이 땅의 종교적 성세는 오늘이 난세라는 것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 될 것 같다. 곧잘 화제에 오르는 얘기가 있다. 만약 크리스트가 이 세상에 재림하여 크리스트의 이름으로 행해진 수많은 일이나 분파간에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싸움등을 목격한다면 크리스트는 아마도 충격을 받고 오싹했을 것이다. 부처 역시 불교도들이 만든 수 많은 불경을 보고 깜짝 놀라리라.
한국은 종교백화점이란 표현에 손색이 없는데, 구한말 선교사로 왔던 헐버트는 한국인의 종교를 이해하기는 어렵다하면서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을 당할때는 영혼숭배자이다. 따라서 어느 한국인의 종교가 무엇인지 알려면 그가 고난에 빠졌을 때에 어느쪽으로 기우는가를 살펴야 한다. 한국인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신앙은 원시적인 영혼숭배 곧 샤마니즘이며 그 밖의 모든 문화는 그러한 신앙위에 기초를 둔 상부구조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경향은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다. 어느 시대이건 사람들의 모든 맹목적 추종과 신앙은 그 종교와 세상에 재앙을 부른다. 개혁정신없는 종교개혁의 맹목적 이념화는 곧바로 그 종교를 개혁의 대상을 전락시킨다.
이 땅의 기독교의 경우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세계에서 천주교를 스스로 받아들여 스스로의 손으로 교회를 세우고 그 후에 서양선교사를 초청한 특이한 체험을 한 민족이 우리민족이다. 토인비는 후진국에서 서양문화를 처음 받아 들일때는 군사학과 의학부터 먼저 받아들인다고 했는데 한국인은 종교부터 시작한 것이다. 어쨋든 이 땅에 들어온 기독교의 오늘의 모습도 파가 갈라져 있는 것은 구교와 신교만도, 신교 쪽의 ‘예장’과 ‘기장’만도 아니다. 실로 수많은 분파가 있고, 그들 사이는 더러는 앙숙과 같다. 예수정신의 정수는 아무래도 사랑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기독교 문화권이 아니면서도 기독교가 세계에서 가장 성한 것으로 유명한 우리나라는 교회 내 분파가 많기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특히 한국에서는 기독교의 신도수가 엄청나게 늘었다. 근대화를 빠른속도로 치러낸 사회에서는 전통종교가 근대화의 요청에 제대로 적응할 만한 여유를 갖지 못해 그 침투여지와 확산속도가 큰 것이다.
지난 92년 10월 3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 교황청 아카데미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3백60여년전 교황청이 갈릴레오에게 내린 선고가 잘못이었다고 인정했다. 교황의 이같은 언급은 교회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은 한 인간에 대한 복권이자 사죄였다. 1633년 로마 종교재판소에 소환된 70세의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부정하라고 강요받았다. 갈릴레오는 “과거의 잘못을 맹세코 포기하며 저주하고 혐오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목숨을 구했지만, 그 뒤 78세로 죽을 때까지 자택에 연금됐다. 종교재판의 마지막 대목에서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또한 중세시대에, 교회는 절대적이었다. 교회의 권한은 세속에까지 확대, 교회가 모든 것을 지배했다. 이 무렵 교회가 벌인 주요 사업 중 하나가 면죄부 판매와 이단추방이었다. 종교개혁 전 당시 교회에서는 면죄부 판매를 독려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사는 돈이 돈상자 속에 땡그랑 소리를 내고 떨어지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난다고 하였으며 죽은 자도 해당이 되었다. 이를 위해 종교재판이란 무시무시한 장치가 마련되어 숫한 사람들이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고문과 화형에 처해졌다.
로마 교황청은 오는 2000년 대희년을 맞아 교회가 안고 있는 과거의 ‘괴로운 유산’을 청산하는 사업을 추진중이다. 그중 하나로 98년초 종교재판 관련기록을 공개했으며, 최근 종교재판에 대해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 위한 심포지엄을 갖는 등 과거의 잘못을 참회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새로운 천년을 맞아 새롭게 태어나려는 교회의 모습을 본다.
우리 종교문화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를 느낀다. 수천 년 동안 우리 의식의 심층부에 의연히 도사린 채 민간 사상의 저류를 형성해 온 것은 다름아닌 원시종교적 샤머니즘인데도 이것이 정통의 지위를 누려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역대에 사사으이 정통으로 인정받고권위를 누린 것은 대개 불교와 유교 같은 그 당시 세계의 보편주의라 할 수 있는 사상을 정권의 공인아래 수용 채택된 외래의 종교 사상이었다.
한편 94년초 테러로 생을 마감한 탁명환씨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의 신흥 종교수는 350여개, 신도수는 2백만명에 달하는데 이중 20%는 사이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단느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신흥종교자체를 좋다 나쁘다로 구분하긴 곤란하다. 다만 개인과 사회적 질서를 부넝, 파괴하는 종교적 이단성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문화가 번성했다는 것은 난세였다는 것을 뜻한다. 각 종교의 창시자들은 당시 살았던 사회조직의 원리들을 반대했다는 것은 이상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은 모두 그 시대의 이해와 권력에 대항하여 싸웠던 반역자이자 혁명가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반역성이 그들의 성공을 설명하는 것은 아닐까. 세계적 종교의 발상지는 어김없이 생존 조건이 핍박했던 곳이라는 것부터 그렇다. 그것은 그 당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웠던 것을 반증한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값싼 아편’이라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현세가 핍박할수록 내세에 대한 기원은 간절해질 수밖에 없고, 현세의 치자가 무서울수록 내세의 신은 더 거룩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 쪽에서 보기로 할 때, 오늘 이 땅의 종교적 성세는 오늘이 난세라는 것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 될 것 같다. 곧잘 화제에 오르는 얘기가 있다. 만약 크리스트가 이 세상에 재림하여 크리스트의 이름으로 행해진 수많은 일이나 분파간에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싸움등을 목격한다면 크리스트는 아마도 충격을 받고 오싹했을 것이다. 부처 역시 불교도들이 만든 수 많은 불경을 보고 깜짝 놀라리라.
한국은 종교백화점이란 표현에 손색이 없는데, 구한말 선교사로 왔던 헐버트는 한국인의 종교를 이해하기는 어렵다하면서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을 당할때는 영혼숭배자이다. 따라서 어느 한국인의 종교가 무엇인지 알려면 그가 고난에 빠졌을 때에 어느쪽으로 기우는가를 살펴야 한다. 한국인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신앙은 원시적인 영혼숭배 곧 샤마니즘이며 그 밖의 모든 문화는 그러한 신앙위에 기초를 둔 상부구조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경향은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다. 어느 시대이건 사람들의 모든 맹목적 추종과 신앙은 그 종교와 세상에 재앙을 부른다. 개혁정신없는 종교개혁의 맹목적 이념화는 곧바로 그 종교를 개혁의 대상을 전락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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