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에 대한 후세적 인식과 유물을 통한 고조선 시대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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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조선에 대한 후세적 인식과 유물을 통한 고조선 시대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초록


Ⅰ. 서 론

Ⅱ. 고조선 시대
1. 단군신화에 대한 제3의 시각
2. 단군신화와 게세르 신화의 관계성

Ⅲ. 고조선 후기 시대
1. 위만조선

Ⅳ. 고조선 이후
Ⅴ. 함의

본문내용

역사를 단절시키지 않았다. 위만이 왕위에 오른 후 고조선을 흔히 위만조선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구분을 하기 위한 것일 뿐, 그는 나라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여전히 (고)조선이었으며, 수도 역시 왕검성(王險城) 그대로였다. 그가 임금이 된 것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이 있을 법하지만 그는 큰 문제없이 고조선을 안정시켰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중원 땅에 온 수 만 명의 망명객이 고조선에서 살고 있었다. 따라서 앞선 고조선 시기에 비해 이때 중원문화가 고조선에 일정하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망명객을 받아들인 것은 준왕이었고, 그것은 고조선이 인구를 늘리고 국력을 키우기 위한 국가전략의 하나였다. 위만이 이들 망명객을 규합하여 권력을 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중원의 문물을 가져와서 고조선을 크게 변화시켰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준왕의 정책이 만든 기회를 잘 이용했을 뿐이었다.
Ⅳ. 고조선 이후
예맥족이 건국한 부여는 秦의 통일 이전부터 494년까지 약 700여년 이상을 존속한
고조선 이후 가장 오래된 국가이다. 이러한 부여의 영역을 현대의 위치로 살펴보면,
남으로는 휘발하를 중심으로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였고, 동으로는 모란강 유역의
서쪽인장광재령산맥, 서로는 대흥안령산맥의 동쪽을 차지하고 있었고, 북으로는 흑
룡강까지로 광대한 영역을 소유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오래되고 강대했던 국가는
삼국중심의 고대사 연구와 사료 부족으로 인하여 그 연구가 미비하였다. 하지만 부
여는 단군의 고조선으로부터 최근 최대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고구려를 이어주는
역사로 무시할 수 없는 우리 역사이다.
부여에 대한 연구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으며, 그 중 주요 논쟁이 되
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북부여와 동부여에 관한 것이다. 이때 북부여는 고구려의 북
쪽에 있었던 부여라는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러나 동부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대두되고 있으며, 이때의 북부여와 동부여가 동일한 국가인지 아닌지에 대
해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국내에서는 일반적으로 해부루왕의 동부여에 대한 언급
을 피하고 있으며, 서기 285년 모용외의 침략으로 이동한 옥저에 동부여가 건국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북부여와 해부루왕의 동부여의 명칭문제는 여러 사서
들을 통해 하나의 국가임을 밝힐 수 있다. 즉 해부루왕이 도읍을 옮김에 따라 ‘I後
부여’의 의미인 ‘I동부여’의 명칭을 사용한 것이고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나타난 동
부여는 346년에 세력이 많이 약해진 ‘後부여’I가 燕 근처로 이동한 부여로 볼 수 있
다. 나하나(2000), 전북대학교.
(그림2) 부여석조 부여석조는 3단의 얕고 둥근 받침 위에 입이 좁은 사발 모양의 동그란 석조통이 놓여 있다. 석조와 받침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고 다만 석조 표면에 가로 얕은 선을 돋우새겼을 뿐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동그랗게 되어 있어 우아한 곡선미를 담고 있는 우수한 석조품이다. 공주 반죽동과 중동의 석조들은 부여석조와는 다른 형식인데 네모난 바닥돌 위에 연꽃잎을 돋우새긴 둥그런 기단이 있으며 그 위에 둥글납작한 석조통이 놓여 있다. 두 석조의 모양은 거의 같은데 다만 중동의 것이 좀 작을 뿐이다. 이 두 석조는 본래 반죽동의 대통사터에 쌍을 이루어 있던 것인데 그 중 하나를 일제가 중동의 헌병대로 옮겨다 말구유로 쓰면서부터 그곳에 있게 되었으며 이름도 그곳 지명에 따라 부르게 되었다.
Ⅴ. 함의
고조선 시대를 비롯한 우리민족의 역사를 살펴보면,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외부의 문화와 비슷한 점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이 외부에서 정착된 민족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으며, 외부에서 정착한 문명이 아니더라도 다른 문화를 존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천민사상을 통한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기에 더없이 유리한 설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세르 민족의 신화와의 차이점인 하늘의 배움을 받고, 하늘의 아들이 세운 민족이라는 특수성을 설화에 포함시킴으로써 우수한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언제든지 생겨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고대국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구성하는 백성들의 선천적인 선함이 고조선 시대를 이어오며 계속해서 이어졌다는 점이다. 낙랑군 설치 이후 도둑질이 심해졌다는 사회현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이 사실이었다면 몇 가지 현상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는 고조선의 통치시스템이 붕괴되면서 사회혼란이 생겨난 것이다. 두번째는 첫번째와 연결이 되는데, 낙랑군이 이를 통제할 능력(즉 경찰력이나 군사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세번째, 만약 군사력이 부재한 상황이라면 평양지역이외의 다른 지역을 낙랑군의 통치에 편입시킬 능력은 더더욱 안되는 것이다. 아무리 낙랑군이 간접지배형식을 취한 '변군'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한국고대에서의 국가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두 가지 제안점을 언급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첫 번째, 우리 민족의 선함을 다시금 살릴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는 역사적 교육을 통해 ‘선천적인 선함’을 가지고 있는 우리민족의 역사를 더욱 많이 알릴 필요가 있다. 후세의 연구를 통해 기존 문헌에 기대지 않고 나온 결론을 통해 우리 민족의 역사적 선함을 재정립할 수 있다는 장점이 분명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역사의식의 고찰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이어온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유물 자체는 그리 잘 지켜져왔다고 볼 수 없다. 많은 침략을 당하였고, 전쟁을 통한 문화재 상실이라는 시련들이 있었지만, 이후에도 이러한 문화재를 찾기위한 국가적인 노력은 분명 부족했다고 보여지며, 선조들의 정신을 정신적으로 이어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접 만지고 볼 수 있는 유물에 대한 관심 역시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는 분명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본 연구는 문헌적 자료를 중심으로 연구되어졌기 때문에 거시적인 관점에서보다는 미시적 관점에서의 연구가 행해졌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 후의 연구에서는 우리 민족 고유의 선민정신을 강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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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1.4
  • 파일형식한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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