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실학자 - 조선시대 호남의 실학자 : 규남 하백원, 존재 위백규, 여암 신경준, 이재 황윤석, 해금 오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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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호남의 실학자 - 조선시대 호남의 실학자 : 규남 하백원, 존재 위백규, 여암 신경준, 이재 황윤석, 해금 오달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규남 하백원
2. 존재 위백규
3. 여암 신경준
4. 이재 황윤석
5. 해금 오달운

본문내용

내(古縣內;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에서 출생하였음. 효심이 깊어 복호(復戶; 조선시대에 충신·효자·군인 등에게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하여 주던 일)를 받았으며, 문장 또한 출중하였고, 1691년(숙종 17) 진사시에 입격하고, 1696년 식년시(式年試) 을과에 급제하였음.
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해금은 해남에서 30세전까지 학문연구와 후진들을 가르쳤으며 이때 이미 향시(鄕試)에 네번이나 장원하였으나 과거시 험에 뜻을 두지 않고 나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금성산 남녘의 영산강 북편에 서당을 지은 후 실용학문인 병서·산경 등의 연구에 집중하였으며 10년간 후진양성에 힘을 썼는데 이때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그는 관직에 뜻이 없었으나 부모님의 봉양에 필요한 돈이 시급한 것과 제자들의 권유로 1740(영조16)년 되는 해에 감시양장과 식년시의 논과 책, 대과의 회시에서 장원을 하면서 1년 5장원의 명성을 떨친다. 그 이듬해 그는 성균관 학유로 제수 되었고 곧 승정원 사관이 되었으나 아버지가 병환을 얻자 고향으로 돌아와 봉양하였으며 돌아가신 뒤에는 3년상을 치렀다. 3년 상을 마치고 1746년(영조 22)에 오수도찰방으로 제수되어 전라도 남원 임지에 부임하여 관직에는 직위의 고하가 없다고 하면서 역폐를 시정하고 우마를 철저히 관리하며 부하들을 사랑해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랐다 한다. 1747년(영조23) 6월 해금은 도회의 시험관으로 나갔다가 더위에 열병이 생기고 평소의 지병이 악화되어 그해 7월1일 세상을 뜨니 향년 47세 였다. 그는 나주시 지량면 가척동에 묻혔다.
-사상 및 성격
그는 당시 호남지방에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등의 실학자가 많이 있었는데 이런 실학시대 지식층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경제적인 실학사상과 진보적인 개혁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경제적 실학사상을 담은 <상제상서(上帝相書)>와 <공도회의(公都會議)> <가주전변부의(加鑄錢便否議)>등이 있다. <공도회의>에서는 과거제의 시행상 모순과 그에 따른 폐단을 지적 특히 농번기인 6월에 과거를 실시함으로써 갖가지 폐해가 발생하고 있다하여 속히 그 시기부터 바꿔져야 함을 주장하고 있으며, <왕패략호남책(王覇略湖南策)>에서는 사회개혁 포부를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9개 조목으로 되어있는 「왕패략」에는 교육, 군사, 사회, 토지에 대한 개혁의지가 밝혀져 있다. 또한 그는 호남이 대접을 받지못하는 까닭을 “호남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 오래지만 아직 기미가 없는 것은 국가가 호남을 푸대접해서가 아니라 호남사람들 가운데 중앙 요직에 자리한 사람이 드물어 문제점을 건의하지 못 할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또한 그는 교육제도에 대한 개혁에서 해금은 단 한줄의 글도 읽지 않은자가 성균관에 입학하여 작문을 할 때 다른사람들에게 부탁하는 등의 능력도 되지 않는 자가 학문을 한다고 하는 것을 보며 극히 한심스럽다고 하여 부실한 교육풍토를 꼬집었다. 또한 재상의 자제나 일반 서민의 자제 할 것 없이 모두 동일한 조건에서 차이없이 교육되어져야 한다며 교육의 기회균등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국가기강을 세우는 것이 개혁의 기초라고 강조하며 인재를 기르는 기본인 「소아교육론」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해금은 어려서부터 어려운 \'천자\'나 \'소시\' \'사기\'를 가르쳐 뜻도 모른채 외우게 하지말고 기초적인 \'시경\'을 먼저 익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어린이를 가르칠 때 너무 급하게 대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너무 급하게 대할 경우 혈기를 펴지 못하여 어렸을 때의 총명이 없어진다고 말한다. 그는 어린이를 가르칠 때 먼저 나의 마음을 안정하고 노기를 가라앉힌뒤 말을 적게하고 관대하게 유도하여 진취시켜야 한다며 어린이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해금집
권1에 가장(家狀)·묘지·묘갈명·시·사(詞)·가(歌)·애사(哀辭), 권2에 전(箋)·사부(詞賦)·서(書)·의(議)·서(序)·기(記)·발(跋), 권3에 잡저·묘비문·행장, 권4에 책(策)·논(論)·왕패략(王覇略)·호남책(湖南策), 권5에 만필(漫筆)·제후(題後)·기·서(序)·시·제문·만장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왕양(汪洋)하고 질탕(侄蕩)한 맛을 풍기고 있다. 「종학도(從學圖)」·「육용설(六用說)」·「인극도(人極圖)」·「공사해(公私解)」·「오상분배칠정론(五常分配七情論)」과 같은 글은 학문의 깊이를 알게 하는 역작이다.
「종학도」는 내도(內圖)와 외도(外圖)로 구별되는데, 내도는 심학(心學)을 주로 한 공자·맹자·정자·주자를 종통(宗統)으로 이를 배우는 과정으로서, 원위(原位)·일위(一位)·이위(二位)에서 육위(六位)까지 7단계를 두었고, 진행 과목으로는 「낙서(洛書)」의 총수 45를 인용하여 45과목으로 배열한 뒤 좌우 양쪽에 성(誠)과 경(敬)을 붙여 놓았다. 외도는 노(老)·불(佛)·양(楊)·묵(墨)·장(莊)·법(法)·변(辯)·선(仙)·명(名)의 9류(九流)가 가는 길로 하도(河圖) 총수 55를 인용하여 구류가 남긴 유폐(遺弊)를 55항목으로 나누어 실은 도식이다. 내도에서는 원위에서 육위까지, 외도에서는 55항목 전부 낱낱이 주와 해설을 가하였다.
「육용설」은 주역·음양(陰陽)의 수를 원용한 것으로, 거기에 지(知)·인(仁)·용(勇)·문(文)·승(勝)·나(懦)의 육목(六目)을 붙여 『주역』의 육효(六爻)처럼 상승 작용을 하게 하였다. 또, 순(純)·특(特)·상(上)·중(中)·하(下)·우(愚)·활(猾)의 7등급으로 학문에 종사하는 자를 나누어 각기 가야 할 진로와 방향을 제시하였다.
「인극도」는 하늘에 극(極)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극이 있다는, 즉 태극에 대한 인극으로, 오행(五行)과 오성(五性), 청탁(淸濁)과 수박(粹駁) 등이 배열된 도설이다. 이밖에도 이러한 유의 도설이 상당수 있는데, 모두 『주역』을 위주로 모든 것을 결부시켜 해석하고 원리를 거기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두산백과 (www.doopedia.co.kr)
-(우리가 꼭 알아야 할)호남인물 100, 남성숙, 송원백화점, 1996.
-이齋 黃胤錫, 최삼룡, 민음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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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1.29
  • 저작시기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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