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⓵ 내물왕과 김제상 - 그 빛나는 충절
⓶ 만파식적 - 평화를 가져오는 신비한 피리
⓷ 원종은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은 순교하다 - 이차돈의 순교
⓶ 만파식적 - 평화를 가져오는 신비한 피리
⓷ 원종은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은 순교하다 - 이차돈의 순교
본문내용
변하여 장수왕대의 고구려가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추진하자, 신라는 백제와 동맹관계를 맺게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계통의 불교에 대해서도 신라 지배층은 경계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 신라 지배층은 이념적으로 무교(샤머니즘)에 가까웠는데, 자연히 불교와 사상적으로 충돌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신라사회는 커다란 발전상을 보여 경주 일원에서 경상도 일대를 석권하는 큰 국가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신라는 국가권력의 재편과 함께 새로운 이념체계가 필요하였고, 법흥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은 불교야말로 이런 필요성에 가장 적합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귀족세력의 반대가 거셌다. 그들은 불교에 대해 느끼는 문화적 이질감과 함께 불교행사에 따른 막대한 경비 지출과 인력의 낭비를 이유로 신라가 불교를 인정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이차돈은 매우 급진적인 방식을 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정치세력 간의 합의 없이 당시 무교의 성지인 천경림의 나무를 베고 거기에다 흥륜사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이에 귀족세력들이 강력하게 반발함으로써 마침내 그가 모든 정치적인 책임을 지고 숙청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불교는 신라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급속히 발전해나가게 된 것이다. 이 이차돈의 죽음을 생각할 때, 그의 죽음이 결과적으로는 불교를 위한 순교가 되었지만 사실은 희생양에 가까운 죽음이라고도 볼 수 있다. 기적이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