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란이 제어하는 데 문제가 많다는 이유였다.
Ⅴ. 후발해의 건국
알려진 바와 같이 926년 발해가 멸망한 후에도 발해 즉 후발해가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며, 그 후발해의 힘 또한 만만치 않아 과거의 발해와 비견될만한 것이었다는 점
|
- 페이지 8페이지
- 가격 5,000원
- 등록일 2009.03.11
- 파일종류 한글(hwp)
- 참고문헌 있음
- 최근 2주 판매 이력 없음
|
|
항하였다.
고영창은 동경 요양부를 점령하여 스스로 황제라 하고, 국호를 대발해라고 하였다.
또 융기라는 연호도 사용하면서 세력을 과시하였다.
대발해국은 거란 동경도 관하의 50주를 공략할 정도로 세력이 늘어났으나, 금나라의 공격으로
|
- 페이지 2페이지
- 가격 500원
- 등록일 2012.02.21
- 파일종류 한글(hwp)
- 참고문헌 없음
- 최근 2주 판매 이력 없음
|
|
발해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발해가 멸망한 후 동란국(東丹國)이 세워졌으나 928에 동평으로 이동함에 따라 발해유민들은 926년 대씨의 후발해국과 1029년 대연림을 비롯한 200여년 간의 반요자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
- 페이지 7페이지
- 가격 2,000원
- 등록일 2012.03.13
- 파일종류 한글(hwp)
- 참고문헌 없음
- 최근 2주 판매 이력 없음
|
|
발해 멸망한 뒤에 거란은 이곳에 동단국을 세우고 통치하였고 928년에는 동단국을 요동으로 옮기면서 발해유민을 강제 이주
- 발해 멸망 이후 각지에서 부흥운동
→ 멸망직후 발해의 서경압록강 지역에서 일어난 후발해국과 이어 나타난 정안
|
- 페이지 15페이지
- 가격 2,500원
- 등록일 2008.05.16
- 파일종류 한글(hwp)
- 참고문헌 없음
- 최근 2주 판매 이력 없음
|
|
후발해국오사국흥요국대발해국)
발해사 인식
신라
양면적 (고구려/말갈)
고려
초기
고구려→발해→고려
서긍(고려도경)
후기
제외
삼국사기 : 제외
삼국유사 : 말갈족
조선
초기
동국통감 : 신라의 이웃국
후기
부정적
고구려 영토 상실
한백
|
- 페이지 12페이지
- 가격 2,000원
- 등록일 2011.05.15
- 파일종류 한글(hwp)
- 참고문헌 없음
- 최근 2주 판매 이력 없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