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금기 문화
본 자료는 7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해당 자료는 7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7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중국의 금기 문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죽음에 대한 금기

2.혼인금기
※띠와 나이에 관련된 금기
※나이차이금기
※결혼시기 금기
※궁합과 관련된 금기
※동성동본금기
※이혼할 수 없는 세 가지 조건

3. 아이에 관한 금기

4. 일상생활에서의 금기

5.음식과 관련된 금기
★젓가락을 사용시 다음과 같은 12가지 금기사항이 있다.

6.식사 중 금기

7.선물을 줄때

8.색깔에 대한 금기

9.숫자에 대해 얽힌 이야기와 금기
※1’부터 ‘10’까지 숫자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념

10.이름과 관련된 금기.
※ 조부(祖父), 부(父)의 명(名)
※ 황제의 명(名)

11.중국 사람의 명절금기

본문내용

으며 문화의 핵심이었다. 사회생활의 각개 분야와 사람과 천지(天地)간의 관계를 조정하였다. 예의 생산은 문명의 발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유화 개념이 발달하지 않은 초기 원시사회에서는 자연의 혜택 속에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이후 인구의 증가에 따른 물질부족과, 너와 나의 것이 구분되는 소유 개념의 발달은 절제를 만들 수 있는 규범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것이 예가 생겨나게 된 원인이다. 예는 사람들을 개인주의 사회에서 집단주의 사회로, 무질서에서 규범 있는 사회로 변화시켰다. 혈연을 중심으로 한 씨족 집단사회는 조상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있고 후손이 있다는 종족의 개념을 새롭게 인식하게 했고 조상숭배사상으로 이어졌다.
주공(周公)에 의해 규범화된 예는 존존(尊尊)과 친친(親親)을 표방하였다. 존존은 존귀한 사람을 존대하는, 즉 군권을 보호하는 忠이 되었고, 친친은 父權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孝가 되었다. 유가사상에서 家와 國은 상통하는 관계로 보았기 때문에 君權은 가장권이 확대된 것으로 여겼다. 즉 가족 내의 효도를 군주에 대한 충으로 여겼기에 가족윤리를 해치는 불효죄에 대해서는 엄한 처벌을 내렸다.
※ 조부(祖父), 부(父)의 명(名)
휘(諱)란 죽은 사람의 생전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가 이후 살아 계신 분에게까지 확대되었다. 피휘(避諱)의 습속은 진(秦)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예기≫ <곡례(曲禮)>에 ‘곡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그 이름을 휘(諱) 한다’ 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피휘 습속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언제나 휘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혐명(嫌名), 즉 아버지의 함자와 비슷하게 발음되는 유음(類音)까지 휘하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이름이 승(昇)이었다고 해서 승(勝)이나 승(升)까지 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두 글자로 된 이름의 경우 한 글자만 휘하지는 않았으며, 셋째 부모가 조부모를 섬기는 것을 보았으면 조부모의 이름을 휘하지만 보지 못했다면 휘하지 않았다. 넷째 임금 앞에서 신하가 사사롭게 휘를 할 수 없었다. 다섯째 시(詩)·서(書)에 있는 글자나 글을 지음에 있어서는 휘하지 않았고 부녀(婦女)의 휘는 문 밖을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먼 친척뻘 되는 대공(大功), 소공(小功)친은 휘하지 않았으며 사당 안에서도 휘하지 않았다.
중국 전통사회에서는 이렇듯 집안 어른 함자에 대한 휘가 엄격히 시행되었기 때문에 ‘국경에 들어갈 때는 금령(禁令)을 묻고, 나라에 들어가서는 풍속을 묻고, 문에 들어가서는 휘(諱)를 묻는다’는 격언이 통용되었다. 이러한 속담은 지금도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 황제의 명(名)
피휘의 습속이 秦나라에 이르러서는 생휘(生諱)로 확대되었다.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진시은 자신의 권력을 신성시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에 대해 휘를 시행하였다. 그의 이름 政이 발음이 같은 ‘正’字로 代字 되거나, 비슷한 뜻을 지닌 ‘단(端)’字로 개자(改字)되었다. 생휘 풍속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한나라 명제 때에는 그의 이름 장(莊)을 뜻이 같은 엄(嚴)자로 바꾸었고 당나라 태종 때에 와서는 ‘世民’의 이름에서 ‘世’자를 ‘代’자로 바꾸어 표기하거나 ‘民’자에서 한 획을 생략하는 결획(缺劃)의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諱俗은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어 신라 진성왕 때 숭복사비문(崇福寺碑文)에 새겨진 보력경오춘(寶曆景午春)이란 글자 중 경오(景午)란 표현은 당나라 고조의 아버지 이름 병(昞)의 음을 피하기 위해 병오(丙午)를 경오로 바꾸어 새겨 넣은 것이다.
또한 이러한 습속은 조상과 황제뿐만 아니라 성현으로 칭송되고 있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에 대해서도 휘하는 습속이 있어서 옛 경전에 기록된 이들의 이름을 지우거나 일부러 읽지 않음으로서 존경의 뜻을 표시하였다.
11.중국 사람의 명절금기
명절때는 많은 금기가 있다. 일부 금기는 물론 아주 오랜 역사적인 기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잘모르고 있다. 어렸을 때 우리는 늘 어른들에게 명절때마다 이래서도 안되고 저래서도 안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떤 금기는 바로 사람 됨됨이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쉴때에는 조용히 쉬라는 것이다. 옛날에 설과 같은 명절은 지금과 달라 매우 바쁜 명절이었다. 설 전에 많은 음식을 장만하느라고 바삐 보내야 했다. 설날 이후부터는 아무 요리도 하지 않고 설 전에 미리 준비해놓은 것을 데워 먹는다. 이것이 설후에는 칼을 쓰지 않는다는 금기이다. 이에 따라 설날의 만두는 섣달 그믐날 밤에 다 빚어 놓아야 한다. 설날에는 청소도 하지 않는다. 만약 청소를 한다면 일년동안의 재운을 다 쓸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리고 가위도 쓰지 말아야 한다. 아니면 재운이 끊긴다거나 자손이 끊긴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섣달 그믐날 밤에 가위를 감추어 놓는다. 혹시라도 설날에 누군가 실수하여 금기를 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설거지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역시 일년 동안에 들어올 재운을 씻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금기는 한마디로 명절때는 잘놀고 휴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하든 휴식과 일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 일을 할땐 열심히 하고 잘놀 땐 잘놀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물론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외국인으로 그 쪽에서 어느 정도 양해도 해주고 하니까 천천히 관심을 가지고 실수해 가면서라도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처럼 경우에 따라서 같은 중국인끼리도 괴이하게 여길 정도가 되는 것을 보면 참 이 중국이란 나라가 넓고 따라서-어차피 수교한지 몇 해 안되기도 했지만-우리가 중국 이해를 위해 드려야 될 시간과 공력이 만만치는 않다는 생각도 든다.
참고 문헌
금기로 본 중국, 중국인 - 왕챵 지음, 채옥자 옮김 비전코리아
중국 문화의 이해(이수웅, 김경일 저 1995, 대한교과서)
중국사회의 지속과 변화 (로이드 E. 이스트만 저 1999, 돌베게)
패사회편 권88, ‘당나라 사람들의 금기’

키워드

중국,   금기,   문화,   금기문화
  • 가격3,000
  • 페이지수22페이지
  • 등록일2008.11.18
  • 저작시기2007.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92847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