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재조지은 정치적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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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진왜란 재조지은 정치적의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재조지은이 형성된 배경 임진왜란
(1) 임진왜란 발발
(2) 명나라 출병
2. 임진왜란 시기 재조지은의 정치적 의미
(1)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시기 재조지은의 의미
(2) 왜란 종료 직후 재조지은의 정치적 의미
(3) 임진왜란 전후 재조지은 현창 사업
3. 광해군대에 전개된 재조지은의 정치 외교적 의미
참고문헌

본문내용

: 신경행, 임득의 역사 전쟁사 까페:http://cafe.naver.com/historywar/66
선조를 호종했던 호성공신이 86명인데 반해 임진왜란에서 전투중 공을 세웠던 선무공신은 18명에 불과하다. 게다가 의병장중 가장 이름을 떨쳤던 곽재우의 경우는 선무공신에 포함 되 있지 않고 김덕령의 경우는 오히려 죄를 물어 옥사 시켰다. 이런 자료들을 취합해볼 때 선조는 자신의 정치적인 위협이 될 만한 공을 세운 의병들과 장수들을 견제하여 격하 시키고 자신들의 공을 부각시키고 전란에 따른 책임소재를 피하기 위해 ‘재조지은’의 명분을 적극적으로 이용 했던 것이다.
(3) 임진왜란 전후 재조지은 현창 사업
앞서 언급했듯이 재조지은을 강조하기 위해 더 확실한 것은 말보다는 행동 이였다. 그러므로 전쟁이 끝나갈 무렵 조선에선 왜란에 참전했던 명나라 인물들의 공로를 현창하는 사업들을 전개하였다. 평양에는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여송의 송덕비를 세우고 무열사란 절을 지어 병부상서 석성과 이여송, 이여백 양원, 장세작등 5명의 화상을 걸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한명기, 「임진왜란 한중 관계」, 역사비평사, 1999, 82쪽.
또한 명의 대소장관들이 세운 공적들을 찬술하고 그와 관련된 서적을 출판하는 담당기구인 천조장관 찬집청을 설치했다. 『선조실록』 권119 선조 32년 11월 기유.
이렇게 활발하게 현창 사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조선이 특히 신경을 많이 썼던 인물은 바로 만력제와 왜란 당시 경리어사였던 양호였다. 그들은 본국인 명나라보다도 더 조선에 대해 신경을 쓰고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황제, 고려재상으로 까지 불렸으며 이런 사실 때문에 조선의 군신들은 더욱 감격에 겨워 이들에 대한
현창 사업에 특히 더 신경을 쓴 것이다. 이렇듯 조선 스스로 재조지은을 강조하고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는 것을 본 명나라의 지휘관들은 앞 다투어 조선에 거만한 자세와 함께 은혜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심지어 자신들이 조선에서 세운 공적의 내용을 구리기둥에 새겨 그것을 부산 등지에 세워달라고 요청 했고 철수가 임박할 무렵에는 구리기둥뿐 아니라 자신들을 찬양하는 내용의 시문을 담은 가요집을 만들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선조실록』 권317 만력 25년 12월 선유.
이러한 상황을 볼 때 향후 조선과 명의 관계에 있어서 재조지은이라는 것은 조선에게 있어서 상당한 부담과 의무감을 지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 이였던 것이다.
3. 광해군대에 전개된 재조지은의 정치 외교적 의미
길고 길었던 왜란이 종료된 이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 했다. 당시 동북아시아는 후금이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고 명나라는 서서히 쇠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전란이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였다. 광해군은 이러한 상황속에서 조심스럽게 후금의 전력을 파악하는 정보전에 주력했다. 그러나 1618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8기군의 수령과군사들을 모아놓고 명나라 조정의 일곱가지 죄를 주장하는 ‘칠대한’을 하늘에 고하는 의식을 치르고 본격적인 명 정벌에 나섰다. 사태를 예의주시한 광해군은 한창 기세 등등한 후금과 명의 충돌에서 말려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불행하게도 광해군에게는 ‘재조지은’ 라는 변수가 존재했다. 재조지은을 모른척 할 수 없었던 광해군은 결국 강홍립에 1만 원군을 주어 명을 도우기 위해 파병 하게 했지만 후금과 척을 지는걸 피하기 위해서 싸우는 시늉만 하고 바로 항복하게 했다. 조선군의 소극적인 전투와 명나라 지휘관들의 무능이 맞물려 조.명 연합군은 심하전투에서 대패하게 되고 광해군은 이후 계속되는 명나라의 파병요청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런 미온적인 태도에도 명나라의 중신들은 조선이 여전히 명나라에 충직한 조공국이라는 인식을 품게 되는데 한명기 「16, 17세기 明淸交替와 한반도 : '再造之恩', 銀, 그리고 쿠데타의 변주곡」 , 明淸史硏究, 2004. 제22집, 50쪽.
이는 광해군의 정치적인 수완이 빛을 발했다고 볼 수 있다.
광해군의 수완으로 청나라와 명나라 양쪽 모두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받지 않는데는 성공 했지만 광해군은 결국 ‘재조지은’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외부적인 덫을 빠져 나오는데는 성공 했지만 광해군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막지 못하고 결국 왕의자리에서 쫓겨났다. 반란을 일으킨 세력은 정치적으로 소수파였던 서인이 주축이였고 이를 인조반정이라 한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명분중에 하나가 바로 광해군이 명나라로 원군 보내는 것에 소극적이였던 것을 빗대어 ‘재조지은’을 배신하고 기만 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재조지은’이 당시 역성혁명에 명분으로 이용 될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조반정이후 조선의 조정은 혁명의 대의를 ‘재조지은’ 으로 삼은 것을 이용해 조선에 대해 막대한 이득을 취하고 조선은 이 명분에 말려서 이미 쇠약해져가는 명나라에게 휘둘리게 된다. 결국 조선은 명나라에 이용당하고 청나라한테는 두 차례 호란을 당하면서 나라가 다시 전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나가며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도중에 등장한 ‘재조지은’ 은 일선에서 왜적과 격렬하게 싸운 이순신과 권율 같은 구국의 영웅들과 의병장들의 역할을 퇴색시키고 이와 반비례하여 실질적인 책임이 무거웠던 선조와 호종 신료들의 정치적인 부담이 가벼워지게 만들었다. 물론 ‘재조지은’ 이 실제로 임진왜란에 지대한 신경을 썼던 만력제를 위시한 명나라에 고마움을 표현한 의미인건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선조가 권력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인 술수로써의 의미가 더 강하게 작용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렇게 선조의 정치권력에 창과 방패로써 쓰여진 ‘재조지은’은 선조 사후에도 명과 후금사이의 문제와 인조반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조선이 여전히 정치적 격동기와 혼란속에 빠지는데 일조하였다.
참고문헌
김시덕, 「그들이 본 임진왜란 」, 학고재, 2012.
정두희,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휴머니스트, 2007.
한명기, 「임진왜란 한중 관계」, 역사비평사, 1999.
한명기 「16, 17세기 明淸交替와 한반도 :'再造之恩', 銀, 그리고 쿠데타의 변주곡」 ,明淸史硏究,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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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7.12.30
  • 저작시기2014.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42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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