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신지식인 - 박지원의 『열하일기』중 도강록을 읽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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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신지식인 - 박지원의 『열하일기』중 도강록을 읽고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슬길이라지만, 지식인으로서의 꿈과 이상까지 버렸겠는가. 현실과 이상의 괴리 사이에서 오는 그 모든 갈등과 배척과 고독 속에서 가슴에 꾹꾹 억누르며 살아왔던 그의 무거운 삶이 왜 이제야 이토록 아프게 다가오는지. 박지원은 칠정(七情)을 말하면서 ‘지극한 울음과 지극한 웃음은 극치에서 서로 통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박지원의 웃음 속에는 그의 울음이 함께 들어 있었나 보다. 자신만의 깊은 아픔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그렇듯 넉넉한 배려와 애정으로 일관할 수 있었다니 그의 인품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내 자신이 또 한없이 부끄럽고 작게 느껴질 뿐이다. 그리고 그가 더욱 좋아진다.
9. 열하로 인해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길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3년에 걸쳐 집필한 것이니 당연하리라. 그 중 내가 읽은 부분은 “도강록” 부분에 불과하다.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 적은 분량으로 박지원을 파악한다는 것은 지나친 오만이다. 그러나 몇 가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그의 갈망, 발전된 문물에 대한 경외감, 또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애정, 여유와 넉넉함, 인간적인 따뜻함, 그 뒤에 깊이 감춰진 그의 아픔이 조금은 짐작이 간다.
하지만 솔직히 박지원이 부럽다. 낯선 세상에 뛰어 들어가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운 것도 부럽지만 무엇보다도 그 여행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성장시켰을 것이... ‘아웃 오브 아프리카’라는 영화에서 매릴 스트립이 아프리카로 떠난 것은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자 진정 소중한 것을 만나게 되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여행이었다. 낡은 경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를 날으며 비로소 얻게 되는 자유! 어쩌면 박지원은 중국이라는 낯선 세상 속에서 ‘삶’의 전환점을 발견하며 자신의 존재를 성숙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의 옛 땅을 둘러 보며, 청나라 여염집과 전당포, 발전된 문명을 보면서, 득룡이, 창복이, 정진사 등 낯선 이들과의 또 하나의 인간적인 만남을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런 구속 없이 낯선 삶 속에서 자유를 가슴에 담으면서 자신을 성숙시켰을 것이라 믿는다. 물론 비로봉 꼭대기와 장연 금모래밭에 이어 드넓은 중국 땅 어느 곳에서 가슴 속에 맺힌 소리도 마음껏 뱉어 냈으리라.
때문에 박지원은 행복했던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록 거창한 벼슬은 못했지만, 그 어떤 명예나 부도 얻지 못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삶을 살았지만, 그는 많은 것을 가졌다.우정과 삶에 대한 관조와 성찰, 여유와 웃음, 해박한 지식, 진취적인 역사의식, 날카로운 비판정신과 현실의식, 마음을 흔드는 글 솜씨,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픔을 성현의 말씀을 빌어 그토록 객관적이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인품을 지니지 않았는가? 그런 그를 누군들 아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박지원이 집에 있는 때를 확인하고서야 임시 과거를 치렀다는 정조 임금의 마음도 그의 진심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비록 정치적인 의도 때문에 그를 문책할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끝없이 총애했을 것이다.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임금이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독서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지원의 글을 읽으면서 정조 임금도 열하를 꿈꾸었을 것이다. 단 한 번만이라도 박지원처럼 낯선 곳으로 여행을 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박지원처럼 사람들과 사심없이 어울리며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재밌는 농담과 얘기를 하며 자유를 누리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왕의 부러움과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행복한 신지식인 박지원! 그의 묘비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지 않았을까?
“열하로 인해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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