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의 교육사상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의 교육사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의 교육사상



Ⅰ. 남강의 연보(年譜)

Ⅱ. 남강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만남들
1) 민족에 대한 자각 - 도산과의 만남
2) 기독교와의 만남

Ⅲ. 남강의 사회 사상
1) 인간본위 사상
2) 민족본위
3) 사회세력 형성론
4) 서민정신
5)기독교 정신

Ⅳ. 남강의 교육 사상

Ⅴ. 교육내용
1) 근대교육
2) 산업교육
3) 민족교육
4) 종교교육에의 지향

Ⅵ. 교육방법
1) 자기혁신(自己革新)을 통한 교육
2) 실천궁행(實踐躬行)의 원리
3) 협동(協同)과 창조(創造)의 원리
4) 사제동행(師弟同行)의 원리
5) 노작생활(勞作生活)의 원리
6) 평생학습의 원리

Ⅶ. 교육사적 의의
1) 민족학원의 창설 및 운영
2) 애국계몽운동을 통한 구국이념의 실천
3)기독교의 민족화 및 토착화
4) 의(義)의 교육 실천


---------------------------<참고 문헌>--------------------------------

본문내용

에 들어가면 응집력이 강한 반면에, 우리 나라사람들은 모래알과 같아서 물에 들어가면 서로 흩어진다는 비유를 자주 듣는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은 재질이 빼어나고 개성이 강하여 독창은 잘하지만 합창으로 전체적 조화를 이루는 데는 미흡하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이에 남강은 협동 창조의 정신으로 개개인이 합심할 때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보았기에 오산학교내외에서 이러한 원리를 강조하였다.
4) 사제동행(師弟同行)의 원리
남강이 즐겨 쓴 말 가운데에는 ‘일꾼이 되라, 나음 나음 나아가라, 그것은 의가 아니다,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남의 종이 되지 말라, 먼저 사람이 되라’ 는 것이 대부분으로 이러한 남강의 신념에 따라 많은 학생들이 1910년부터 3.1운동 전후에 길러졌다고 한다. (미국에 건너가 도산과 함께 흥사단을 발기한 김도태, 백병원의 설립자 백린제, 제헌국회의원이었던 주기용, 평양감옥에서 순교한 목사 주기철 등) 김도태, 남강 이승훈전, 서울, 문교사, 1950, p.45
또한 남강은 오산에서 사제간이나 선후배간에도 존대말을 하여 개개인을 서로 존중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강은 학생을 키워내고 졸업생을 배치하고 지도하는 데 놀라운 열과 정성을 부었다. 이와 같이 남강은 사제동행을 몸소 실천하였다.
5) 노작생활(勞作生活)의 원리
남강은 서당을 수리하여 강명의숙으로 바꾸면서 손수 수리하고 종이도 바르고 흰회를 칠하고 단장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제주도 유배시 교회를 설립할 때도 주민들과 함께 돌을 나르면서 직접 교회건설에 참여하였다. 단순히 이론가, 사상가가 아닌 칠천가였던 그는 매사에 직접 나서서 몸을 움직였다. 이러한 그의 생활은 오산의 하나의 가르침이었다.
6) 평생학습의 원리
그는 52세 때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그는 신구약, 교회사, 설교학, 교회법, 한국사 등을 배웠다. 이는 자기혁신의 원리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 새롭게 하는 데 힘썼기 때문에 생활의 모든 것을 학습자료로 삼고 뭐든지 옳다 싶으면 그것을 배웠다. 그가 뒤늦게 신학교에 입학한 것도 이와같은 이유에서였다.
Ⅶ. 교육사적 의의
1) 민족학원의 창설 및 운영
남강은 오산 용동에 있던 서당을 증축 수리하여 서북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사립 소학교인 강명의숙을 세웠고, 이 소학교만으로 만족할 만한 교육을 실시할 수가 없어서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907년 오산학교를 창립하였다. 서북지방에서 맨 처음 민족 사학의 개척자로서 그 공이 교육사적 의의에 첫째라 할 수 있다.
2) 애국계몽운동 한말의 애국계몽운동은 일반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 개념으로서 1905년 11월 소위 을사조약에 의하여 국권을 박탈당한 후 개화자강파가 중심이 되어 완전한 국권을 회복할 것을 목적으로 전개한 1905-1910년 사이의 민력 계발과 민족독립역량 양성운동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동시에 애국계몽운동은 의병운동보다는 신교육운동, 민족종교운동, 언론계몽운동, 민족산업 진흥운동에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을 통한 구국이념의 실천
남강은 시당 여준 독립운동가. 경기 용인 출생. 정주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북간도로 건너가 서전서숙을 세워 민족교육에 힘썼다. 김좌진, 안립등과 함께 39인의 이름으로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 31운동 후에는 서로군정서 부독판, 한족회 간부를 역임.
과 단재 신채호 그리고 수많은 교사들을 오산으로 데려와서 기울어가는 국운을 교육으로 회복하려고 전력하였다. 남강은 우리 나라 안에서 민족 속에 파고 들어가 교육과 문화와 종교의 힘으로 우리 민족을 올리고 발전케 하는 것이 독립의 지름길이라고 하였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많은 미션계 학교, 관학, 민족사학 중에서 민족 사학의 구국전개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고 그 중에서도 도산의 대성학교와 남강의 오산학교를 가장 높게 평가하였다. 이러한 학교는 바로 민족 운동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된 학교로 민족 사상의 고취에 역점을 두었다.
3)기독교의 민족화 및 토착화
남강은 합방 전후의 끓어오르던 애국심이나 3.1운동의 민족의 정열이 점차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남강은 이것이 민족을 위한 우리들의 결심과 헌신이 부족한 데서 오는 것이라고 보고 이는 올바른 신앙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신앙에 밑받침을 받은 애국심이 긴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남강은 ‘성서조선’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무교회주의 신앙 동인지. 일본에서 무교회주의 기독교의 창시자였던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김교신함석헌송두용정상훈유석동양인성 등 6명이 1927년 7월에 창간하였다.
지 동인들이 일으키는 신앙 개혁운동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여기에 실린 김교신의 글과 함석헌의 글을 음미하면서 읽었다. 그들의 글에서 풍기는 한국 냄새와 소박한 복음 신앙을 높이 평가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기독교는 종교 그 자체라기 보다는 민족의 애국심을 위한 하나의 신념으로 자리하였다.
4) 의(義)의 교육 실천
남강은 옳은 것과 나은 것을 구분하였다. 옳고 그른 것은 분명한 준거가 있고 나은 것과 덜 나은 것은 서로 상대적인 가치의 의미가 있다. 그의 생활을 한마디 말로 요약하면 올바른 것을 향해 ‘나음 나음 나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강은 기울어져 가는 한국을 깊은 의의 실천으로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또한 교육사업에 혼신의 심을 다 바쳤다.
현대 교육과 한국의 교육이 정처없이 표류하고 있는 인상을 주는 이 시점에서 남강의 의의 교육 실천이 크게 요청된다.
---------------------------<참고 문헌>--------------------------------
김기석, 남강 이승훈, 서울, 현대교육총서출판사, 1964.
김명길 역, 남강 이숭훈과 독립 쟁취의 교육, 서울, 남강문화재단편, 1988.
김형석, 남강 이승훈과 민족운동, 한국기독교사연구, 1987.
서광일, 1920년대 사회운동과 남강, 서울, 남강문화재단, 1988.
정연덕, 남강 이승훈 연구, 서울,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1982.
함석헌, 남강 이승훈 선생의 생애, 서울, 남강문화재단 편, 1988.
  • 가격1,8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18.12.12
  • 저작시기2018.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7365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