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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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격이 주어 진 5년제 고등보통학교로 이미 승격된 배재고보에 편입학한 후 졸업하게 된 것도, 오산학교의 민족주의 교육 전통을 지키기 위해 벌인 일제에 대한 3년 간의 저항과 관련되어 있다.
오산고등보통학교는 1938년에 공포된 새 교육령에 따라 1939년 일본인 중등학교 명칭인 오산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이는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일본인과 동등한 교육을 실시한다는 표면적 이유 아래 전개된 노예화 교육의 일환이었다.
일제의 황국 신민화(皇國臣民化) 교육이 기세를 떨친 이 시기에도 오산의 민족 교육은 전통의 맥을 잇고 있었다. 정식 과목에서 제외된 조선어 교육에는 일생동안 한복만을 입고 조선어 사랑을 학생들에게 심어 준 철저한 민족주의자 이탁, 이근칠(李根七) 등이 힘썼다.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역사의 전환과 광복의 여명을 예언적으로 가르치고, 성자다운 몸가짐과 곧은 지조로 학생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함석헌. 남강을 새롭게 인식시킨 전기 '남강 이승훈'을 저술한 김기석(金基錫), 대향 이중섭(大饗李仲燮)을 키운 미술 교사 임용 련(任用璉) 등은 오산학교를 일제가 말하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집단, 즉 겨레 사랑에 헌신하는 민족 학교로 만들었다.
오산의 예술로 승화시킨 '소'의 화가 이중섭(25회), 일제 학도병에서 탈출하여 광복군 제3지대 공작 책임자로 일본군 점령 지역에 잠입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일본 법정에서 일본어의 사용을 끝까지 거부하며 순국한 한성수(韓聖洙·28회), 학도병을 탈출하여 조선 의용군과 광복군, 황포군관학교를 거쳐 국군 기병대 대장으로서 6·25 전쟁에 참전 중부 전선에서 산화한 일명 장철부(張哲夫)로 알려진 김병원(金秉元·30회), 1944년 졸업 이후 일본어를 단 한 마디도 사용하지 않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최연소 광복군으로 활약하다가 광 복 이후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한 현 광복군 동지회 회장 김영일(金 永逸·33회) 등의 졸업생이 오산 정신을 빛냈다.
▶ 참고 문헌
이교현 < 남강의 생애와 정신> 남강문화재단
동아일보, 남강 이승훈 전기 (금도태, 문교사, 1950),
한국근세위인전 (오재식, 항정신문사, 1958),
3·1운동비사 (이병헌, 시사시보사, 1959),
남강 이승훈 (김기석, 세운문화사, 1970). 〈금호일〉
http://www.comj.com/doc/lee/LEE-14.htm
http://osan.hs.kr/history/hist2.html

키워드

남강,   이승훈,   오산,   근현대사,   한국,   조선
  • 가격1,000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4.11.28
  • 저작시기2004.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5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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