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지역 답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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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읍지역 답사자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정읍지역 개관
Ⅱ. 정읍 지역의 당산(堂山)·솟대 ·남근석
Ⅲ. 무성서원과 김동수 고가
Ⅳ. 정읍의 탑들
Ⅴ. 내장사와 내장산의 단풍길
Ⅵ. 정읍의 동학혁명 유적지

본문내용

할 날만 기다렸다. 1894년 1월 10일 밤, 미리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 배들평 말목장터로 모여들었다.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이고 손에 손에 괭이와 죽창을 든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20여 리 떨어진 관아까지 가는 길에 마을마다에서 농민들이 쏟아져 나와 사람들의 수는 점점 불어났다. 1월11일 새벽에 이들은 별 힘도 들이지 않고 고부 관아를 점령했다.
고부를 점령한 농민군은 정월 17일에 말목장터로 나와 진을 쳤다. 이렇듯 고부농민봉기가 장기화되자 정부에서는 새로운 고부군수로 박원명을 새로 임명하는 한편 장흥부사였던 이용태를 고부군 안핵사(조선 후기 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처리를 위해 파견한 임시 직책)로 임명하여 고부농민봉기를 조사 보고하게 하였다.
새로운 고부군수로 임명된 박원명은 농민군 우두머리들을 만나 농민들의 요구 사항을 시정하겠다는 약속과 아울러 지금 해산하면 그 누구도 책임을 물어 처벌하지 않겠다고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백성 알기를 벌레보다도 못하게 생각했던 당시 관리들의 태도와는 달리 성의 있게 설득하는 군수의 태도와 악질 군수 조병갑을 몰아냈다고 생각한 농민들은 하나 둘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안핵사 이용태는 고부 농민들이 해산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역졸 800명을 이끌고 고부로 들어와 진상조사를 한답시고 군수 박원명이 약속한 내용을 뒤집어엎고 주모자를 찾아내라고 위협하며 닥치는 대로 백성들을 구타하고 재산을 약탈하며 집집마다 불을 지르며 부녀자를 강간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 때 전봉준은 전라도 무장(현, 고창군 무장면)에 있었다. 말목장터에서 농민들의 해산을 만류하던 그는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인근 민가에 무기를 분산시켜 감춰놓고 무장으로 갔다. 무장에는 전라도 내 최대 동학조직을 이끌었던 손화중이 있었고 그래서 재차 봉기를 위해서는 손화중의 도움이 필수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시기상조라 머뭇거렸던 손화중도 고부의 참상이 전해지자 함께 봉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은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폭정을 제거하여 백성을 구한다〔제폭구민=除暴救民〕’는 내용과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보국안민=輔國安民〕’는 기치로 사발통문을 돌려 분연히 일어서 주기를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말목장터에는 감나무가 있었으며, 1994년 감나무 옆에 말목정이 세워졌다. 옛날의 감나무는 박재되어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3-4. 백산·백산창의비
발걸음을 부안 쪽으로 돌리면 1894년 3월에 본격적인 농민군 부대를 편성하고 행동강령을 발표했던 백산을 만나게 된다. 해발 50미터도 채 안 되는 산이지만 주위가 모두 평지인 탓에 산 위에 올라서면 주변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오고 동진강이 뒤쪽으로 흘러 요새로서의 입지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곳은 원래 다른 이름이 있었으나 혁명 당시 온 산이 흰 옷을 입고 죽창을 든 농민군으로 뒤덮
혀 \'앉으면 죽창만 보여서 죽산(竹山)이요, 서면 흰 옷만 보여서 백산(白山)이라\'는 말에서 백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한다.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에 있는 이 곳 정상에는 백산창의비가 서있어 농민군들의 기상을 나타내고 있다.
3-5. 황토재 전적지
황토현은 농민혁명의 역사상 최초로 농민군이 관군을 격파한 전적지이다. 황토로 이루어진 야트막한 언덕인 황토현은 본디 관군이 진을 친 곳으로 1894년 4월 7일 관군인 전라감영군은 맞은편의 사시봉에 진을 친 농민군을 공격하였으나 농민군은 위장전술과 매복으로 공격에 나선 관군을 패퇴시킨 것은 물론 그 본진이 있던 황토현까지 역습함으로써 대승을 이뤄 농민군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던 곳이다. 현재 이
곳에는 전봉준장군의 동상과 사당, 유물 등을 전시한 기념관으로 이루어진 황토현전적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황토현 마루에는 전봉준 장군을 기린 \'새야새야 파랑새\' 등의 구전민요와 당시 농민군 구호가 새겨진 동학혁명 관련 최초의 기념탑인 갑오혁명기념탑도 우뚝 서 있다.
3-6. 원평 땡뫼산
원평은 전봉준이 소년 시절을 보낸 곳으로, 태인 쪽으로 원평 시가지가 끝나는 곳에 인근 사람들이 땡뫼산이라 불리는 산이 있다. 산 위에는 김덕명 장군 추모비가 서 있다. 김덕명은 무장 기병 때부터 참가하여 황토재 전투, 장성 전투, 전주 점령 등 농
민전쟁의 전 과정에서 활약을 했고 1895년 3월 29일, 이 부근에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다.
1894년 11월 25일, 이 부근에서는 농민군의 마지막 싸움 가운데 하나인 원평전투가 벌어졌다. 11월 9일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부대에 진 후 남하하던 전봉준 부대의 3천여 명은, 공주·논산에서부터 후퇴해 온 농민군 및 현지에서 합류한 농민들과 함께 추격해오는 관군과 일본군을 맞아 원평에서 전투를 버렸다. 포탄과 탄환이 비 오듯 날고 맞붙어 찌르고 베는 전투 끝에 농민군은 밀리고 말았다. 전봉준은 다시 태인으로 내려가 마지막 싸움을 벌인 후 군대를 해산하고 잠행에 들어간다.
지금 있는 원평 읍내 국도는 일본인들이 닦은 것이고 원래의 길은 땡뫼산 길 건너편에 있는 조무산 뒤쪽의 냇물을 따라 나 있었다고 한다. 전투는 그 길 부근에서 벌어졌고, 그 일대로부터 태인 방향으로는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후손들이 찾아가지 않은 농민군의 무덤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 황토현에서 곰나루까지-
정희성
이 겨울 갑오농민전쟁의 전적지를 찾아 황토현에서 곰나루까지 더듬으며
나는 이 시대의 기묘한 대조법을 본다 우금치의 동학혁명군 위령탑은
일본군 장교출신 박정희가 세웠고 황토현 녹두장군 기념관은 전두환이 세웠으니
광주항쟁 시민군 위령탑은 또 어떤 자가 세울 것인가
생각하면 지나는 마을마다 텃밭에 버려진 고추는 상기도 붉고
조병갑이 물세 받던 만석보는 흔적 없는데 고부 부안 흥덕 고창 농투사니들은 지금도
물세를 못내겠다고 아우성치고 백마강가 신동엽 시비 옆에는
반공 순국지사 기념비도 세웠구나 아아 기막힌 대조법이여 모진 갈증이여
곰나루 바람 부는 모랫벌에 서서 검불 모아 불을 싸지르고
싸늘한 성계육 한 점을 씹으며 박불똥이 건네주는 막걸리 한잔을 단숨에 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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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3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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