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지역 답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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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무안지역 답사자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나주·무안개관
2. 나주 향교
3. 나주 돌당간
4. 운흥사터 돌장승
5. 불회사(佛會寺)
6. 철천리 석불입상 · 칠불석상
7. 회산 백련지

본문내용

정은 불상내부 눈의 위치에 수정과 같은 다른 재료를 아교와 같은 접착제로 붙인다. 붙인 눈동자의 뒷면에 채색을 하고 그 뒤에 눈동자보다 크고 얇은 목판을 대고 죽정(竹釘) 등으로 나무를 고정시켜 작업을 완료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일본과는 조금 다른 양상이었던 것 같다.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해남 강진에서 발견된 머리만 남은 소조 나한상은 눈동자에 홈이 파여 있었는데 여기에 아마도 다른 재료를 감입하고 눈두덩이 부위를 흙으로 발라 눈동자를 고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법은 건칠상의 눈동자에도 비슷하게 적용되었을 것이다. 즉 눈동자 부위를 홈을 파고 다른 수정과 같은 물질을 감입하여 눈두덩이를 호분 등으로 발라 고정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일본과 같이 눈동자 뒤에 목판을 대고 죽정으로 고정한 사례가 엑스레이 상으로 발견된 것이 없어 이러한 생각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 우리나라 건칠상중 눈동자를 감입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일본 大倉集古館 건칠보살좌상, 심향사 건칠여래좌상, 선국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죽림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등이 있으며, 눈동자의 감입은 건칠상에 한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안동 봉정사 목조보살좌상,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등 목불에서도 확인되어 이 방법이 건칠상과 목조상 그리고 소조불상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6. 소조보살입상
불회사 소조보살입상은 본존불인 건칠불의 좌우 협시불로 15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어 조성의 연대도 빠르고 조형성도 뛰어난 편이며 고려·조선 전기를 걸쳐 오면서 조상되는 조각사적 흐름을 엿볼 수 있어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있다.
6. 철천리 석불입상 · 칠불석상
6-1. 석불입상 : 보물 제462호.
높이 5.38m. 광배(光背)와 불신(佛身)·대좌(臺座)가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리는 소발(素髮)에 육계(肉)가 둥글고 납작하며, 얼굴은 사각형으로 약간 비만해 보이는 인상이다.
반쯤 뜬 길쭉한 눈과 큼직하고 납작한 코, 그리고 크지만 약간 미소를 띠고 있는 입 등은 생동감이 사라진 모습이다. 목은 짧고 굵은데 삼도(三道)가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체구는 얼굴에 비하여 다소 짧은 편으로 당당한 느낌을 준다. 둥근 어깨에는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쳤는데, 가슴이 거의 노출되지 않고 몸 전체에 걸쳐 옷주름이 묘사되었다.
즉, 가슴에서 발목까지 U자형의 옷주름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었고, 두 팔에 걸쳐진 옷자락은 길게 수직선을 이루며 발 아래까지 늘어져 있다. 두 팔은 두꺼운 옷자락에 의하여 양손만이 드러났는데,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밑으로 내리고, 왼손은 위로 향하고 있어 일반적인 시무외인(施無畏印)·여원인(與願印)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광배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으로, 두 줄의 선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구분하고, 두광 안에는 연화문과 화문(花文)을, 신광에는 운문(雲文)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광배의 가장자리에는 화염문을 새겼으나 그리 유려한 편은 아니다. 대좌는 사각대좌로서 아무런 장식도 없다. 비만한 얼굴에, 당당하면서도 괴체화(塊體化)된 신체의 표현, 대칭적이며 규칙적인 옷주름의 표현 등은 고려 초부터 유행하던 거불(巨佛)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 조성연대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6-2. 칠불석상 : 보물 제461호.
높이 0.95m. 원추형의 바위 측면에 좌상 2구, 입상 4구 등 모두 6구의 불상을 비스듬히 조각하였다. 서면에 2구의 불상을 떼어 낸 흔적이 있고, 바위 꼭대기에도 동자상(童子像)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9불(佛)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없어진 서면을 제외한다면, 동면과 북면에 좌상이 각각 1구씩, 남면에 4구의 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배치 형태로 보면 사방불(四方佛)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도 추측되나 도상적(圖像的) 특징은 뚜렷하지 않다.
불상들은 모두 부조로 되어 있다. 얼굴 부분은 깊게 새긴 부조로 표현하고 신체는 약간 도드라지게 묘사하였다. 6구의 불상 모두 소발(素髮)에 육계(肉)가 크고 둥글게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갸름하나 마멸되어 세부 수법이 뚜렷하지 않다.
동면과 북면의 좌상들은 넓은 어깨에 통견(通肩)의 법의가 가슴 부근에서 교차되었다. 그리고 계단식의 옷주름이 얕게 음각되어 있다. 결가부좌한 다리의 주름도 두 줄의 선으로만 몸의 굴곡을 묘사하였다.
남쪽에 있는 4구의 입상은 좌상과 같은 수법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표현이 좀 더 딱딱하다. 그 가운데 3구는 꼿꼿하게 선 자세로 두 손을 몸에 붙인 채로 처리하였다. 가장자리의 상만이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이며, 옷주름은 몇 줄의 선으로 간단하게 표시하였다. 상들의 발밑에는 약간의 턱을 만들어 대좌(臺座)를 대신하고 있다.
빈약한 체구에 형식적으로 처리된 간략한 옷주름 등 조각 수법이 도식화된 불상이다. 그러나 원추형을 이루는 바위의 네 면에 불상을 조각하여, 사방불의 형식을 취한 듯한 작품으로 조성 연대는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7. 회산 백련지
전체 면적 33㏊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백련 자생지이다. 일제 시대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만들어진 평범한 저수지가 아름다운 연꽃으로 가득한 공원이 된 것은 한 농부의 꿈에서 시작되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정수동 씨는 1955년 여름 무렵 하늘에서 열두 마리의 학이 저수지에 내려앉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동네 아이들이 주워온 연뿌리 열두 주를 저수지 가장자리에 심고 정성껏 가꾸었다고 한다. 이후 영산강종합개발로 저수지가 무용지물이 되자 저수지의 수위가 점점 낮아져 연꽃 자생에 적절한 환경으로 바뀌어 백련이 급속도로 번져나갔고 1997년에 연꽃축제를 시작하면서 거대한 백련지로 가꿔지게 된 것이다. 280m 길이의 백련교가 넓은 백련지를 가로지르며 놓여 있고 연못을 따라 산책로와 쉼터가 깔끔하게 갖춰져 있다. 연못 안에는 수련, 가시연꽃, 홍련, 애기수련, 노랑어리연 등 30여 종의 연꽃과 50여 종의 수생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자연학습장과 수생식물생태관이 있어 연꽃의 식생에 대해 자세히 공부할 수도 있다. 해마다 8월 중순에 무안백련대축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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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5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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