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파시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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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파시즘의 기원
2. 이탈리아의 파시즘의 전개
(1) 파시스트정권의 성립과정
(2) 베니토 무솔리니의 등장
(3) 이탈리아 파시즘의 진화와 이탈리아의 사회

Ⅲ. 결론

본문내용

에 〈중간주의〉의 사고 방식을 만연시킬 수 있을 정도였고, 아직도 대학에는 상당한 정도로 표현을 자유를 허용하고 있었다. 1925년 이후 이탈리아 국내의 지식계급 안에서는 파시즘에 등을 돌리는 풍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학계를 포함한 당시의 지식인 대부분의 사세가 파시즘을 직접 공격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이 맨 처음 벽에 부딪친 것은 다름 아닌 문화의 영역에서였다. 그러나 여기서 파시즘이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고 하더라도 파시즘정권은 아무런 지장도 없이 민중에게 반 강제로 입당을 시킬 수 있었으며, 이것이 난관에 봉착했던 것은 1940년 10월에 그리스에서의 군사적 패배가 있은 뒤의 일이다. 파시스트정권이 힘과 단결력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반대세력의 힘이 너무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국외로 나간 망명자들은 국내의 여론을 거의 파악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적어도 1943년까지는 이탈리아 국내에 저항운동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에 파시즘이 붕괴한 것도 결코 저항운동이 압력에 의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파시즘이 탄생하여 번영기를 거쳐 최후로 사멸할 때까지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따라서 모든 이탈리아 국민은 전 생애 가운데 거의 1세대를 파시즘 속에서 지냈다는 이야기가 된다. 파시즘은 소극적이고도 무질서한 발전과정을 거쳐, 미리 정해놓은 방향으로 발전했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때그때 주위의 상황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파시즘의 이론이라는 것은 단지 경험에만 의존하여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파시즘이 독창적이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나, 정권의 자리에 있었던 시기의 파시즘은 지배계급을 통치했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지배계급의 힘을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고 하는 편이 옳은 것이다. 이 나라의 정치적인 전통에 적응하려고, 파시스트정권이 제멋대로 정책을 실행하는 것을 단념하고 나서부터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파시즘은 어디까지나 보수적인 정치운동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었고 결코 반동적인 성격의 것은 되지 못했다.
파시즘이 잡다한 극우단체에서 때로는 배워 얻는 것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이 다른 극우 단체와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파시즘이 스스로를 바로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던 점, 또한 그토록 많은 당원을 모을 수 있었다는 점, 이 두 가지였다.
파시즘이 생성, 발전을 지속했던 시기는 바야흐로 이탈리아 경제가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체제에서 공업을 주체로 하는 체제로 이행하고 있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토록 오랫동안 민중을 지배했던 이상 파시즘이 역사에 남긴 공적도 없을 수 없다.
Ⅲ. 결론
파시즘의 쇠퇴는 그 체제가 종국적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전쟁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미 많은 파시스트반대자들은 '파시즘체제가 전쟁으로 치달을 것'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국내보수세력이나 동 서구의 고위정치세력가들은 파시스트들의 역동성을 유화정책이나 포위정책으로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오판하였다.
이미 1차대전후의 영토분할에 불만을 갖고 있던 이탈리아는 1935년에 이디오피아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무솔리니는 이디오피아를 격파하고 동아프리카제국을 건설하였고, 1936년에 시작된 에스파냐내전에 독일과 함께 격파하였다. 자국내의 평화주의 물결의 확산, 그리고 1차 대전 참전이 갖다준 교훈에 의해 영국과 프랑스는 에스파냐전쟁을 전면적으로 확산시키지 않을 결심으로 에스파냐에 대한 전쟁물자의 공급을 금지하였다. 독일에서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저항운동이 미미하였던 까닭에 거기에서 어떠한 사회세력화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이탈리아가 연합군과 체결한 휴전협정이 발효되기 얼마전인1943년 9월 8일 독일군은 연합군이 미처 점령하지 모산 북, 중부이탈리아를 전격적으로 장악하였다. 그 후 독일군은 이전의 동맹국이었던 점령지역을 체계적으로 잔인하게 약탈하였고, 게쉬타포나 친위대는 유태인과 정치적 반대자를 찾기 위해 온 지역을 뒤엎고 다녔다. 무솔리니는 독일의 낙하산부대의 의해 구출되어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연합군과 이 저항운동인 파르타잔의 공격, 그리고 파업 때문에 이 공화국 역시 오래버티기 힘들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하였다. 사망한 군인수는 소련이 700만이상, 독일이 350만이상, 중국은 22만 이상, 일본은 130만으로 추산하고 있으나 공식통계에 인정되지 않은 민간인의 희생을 감안한다면, 아마 2차대전의 희생자수는 3천 5백만에서 4천만에 달할 것이다. 이렇게 전쟁의 종식과 함께 막을 내린 파시즘은 자본주의 체제 위기의 산물로 등장했지만, 동시에 시민계급의 헤게모니가 약화되고 분쇄될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이 대중에게 있어서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성립될 수 있었다. 파시즘운동은 금융자본이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의 전 단계인 정치적 위기의 산물로서 나타난' 예외적' 형태의 자본주의 국가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런 만큼 1930년대는 세계도처에서 파시즘이 풍미했던 시대였다. 그 정점을 이룬 것이 독일의 나치즘이고 이탈리아의 파시즘 이지만 이들과 대체로 때를 같이 하여 세계곳곳에서 파시즘 혹은 유사 파시즘 정권 내지 운동이 열병처럼 발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짧은 생애로서 역사의 표면무대로부터 파시즘은 사라져버렸지만 그래도 완전히 근절되었다고 이해되기 어려운 것은 21세기에 직면한 오늘날의 파시즘의 부활에 대한 경종이 다시금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파시즘은 단지 역사적 사시로서 끝난 것이 아니라 미래세계에 있어서 그 자체가 영원히 새로운 형태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서동만 편역, 파시즘연구, 거름, 1982
A. 미쉘, 유기성 역, 세계의 파시즘, 청사, 1978
배영수편, 서양사 강의, 한울 아카데미, 1992
르네 알브레 히트-까리에, 유럽외교사하, 김영식, 이봉철역, 1982
강세균편역, 자본주의 위기와 파시즘, 동녘,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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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1.06.21
  • 저작시기2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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