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선교 동향과 한국에 대한 선교정책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열강의 식민지 확장과 세계선교

2. 한국에 대한 선교정책의 대명사 네비우스 방법
3. 선교와 성경 번역사업
4. 선교사들의 문화사업

5. 순회전도와 문화사업
6. `선교지 분담` 정책
7. 한국교회의 자립정책
8. 신학교육정책
9. 사회계층에 차별적으로 대응한 선교정책
10. 교회의 자립화 정책은 개교회주의와 무관하다
11. 선교사들의 정치에 대한 대응

맺는 말

본문내용

리는 선교사들에게는 일체 비밀로 하여 거사한 점이 바로 그러하였다. 한국 교인들은 선교사들이 비록 같은 하늘나라 시민이지만, 세상에서는 서로 소속이 다른 사람으로 이해하였다. 선교사들은 이 땅에서 치외법권을 누리며 사는, 저 다른 나라에 속한 시민이요, 자신들은 겨레와 고락과 운명을 같이하는 이 땅에 속한 시민임을 현명하게도 인식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건은 역사적인 상황에 대응하는 이러한 입장의 차이 때문에 선교사들의 신학이 그대로 이식되지 않고 토착적인 신학이 생성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내한 선교사들의 처지는 백인이 통치하는 식민지에서 백인에게 반감을 가지고 식민주의의 앞잡이로 오해하며 반발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선교사들의 처지에 비하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유리하고 행복한 것이었다.
'105인 사건'의 경우를 보면, 일본에 주재한 선교사들은 일본 정부의 주장을 믿는 편이었으나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은 일제 정부로부터 그 사건에 직접 간접으로 연루된 것으로 경고를 받았을 뿐 아니라, 사건의 진실을 알고 한국 교인들 편에 서서 말하였다.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난 이후에는 해외에 이를 알리고 한국 백성들을 대변하는 활동을 폈다. 한국 시민이 아닌 선교사들에게 일제 정부에 항거하는 우리 백성 편에 그 이상으로 가까이 서 주기를 바라는 것은, 그리고 그런 시각에서 선교사들을 비판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선교사들이 교회가 식민주의 정부에 항거하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교회가 되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교인들의 비정치화를 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1907년을 전후한 대부흥마저도 비정치화를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부흥운동은 사람이 염원하는 대로 주어지거나 마음먹은 대로 조작되거나 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성령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이후 신사참배의 박해 아래서 한국교회는 신학적인 견해에 따라 두 가지 자세를 가지는 그룹으로 나뉘었다. 정치와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이들은 교회가 살아 남기 위하여 신사참배정책에 굴복하고 일제에 부역하는 길을 택하였는가 하면,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은 외형적인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신앙을 위하여, 즉 교회의 내적인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종교와 정치는 분리라는 원칙을 내세우며 일제의 종교탄압정책에 불복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가 해방된 조국의 정부에 대하여서도 교회와 정치의 분리를 명분으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 것은 일제시대에 취했던 자세의 관성 때문에 그러하고, 교회와 정치의 분리라는 원칙이 정치적 및 사회적 상황에 따라 그 함축성(뉘앙스)을 달리함을 이해하지 못해서이며, 역사적인 상황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그러한 경향은 본래 영적인 각성에 관심을 가지는 부흥주의적이며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 갖는 보편적인 경향이기도 한데, 한국교회의 분열로 인하여 이러한 그룹의 자세는 정치와 사회에 적극적인 참여를 말하는 그룹과 유감스럽게도 교회를 달리함으로써 피차의 사상과 자세가 더 양극화된 것이다.
맺는 말
한국교회는 시초부터 재정적으로는 자립하는 교회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장로교의 경우 20년이 경과하여서는 선교사들로부터 교회의 치리권을 넘겨 받았다. 감리교는 남북 선교부 아래 있던 교회들이 1930년에 하나의 감리교회로 출발하면서 한국인 감독이 치리하는 교회로 출발하게 되었다. 신학교육에는 한국인이 감리교의 경우 1915년에 교수에 참여하였으며, 장로교회의 경우는 30년대 초엽부터 참여하였다. 초대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은 다양했는데, 한국교회는 주로 선교사들의 전도활동만을 넘겨 받아 전도하는 교회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교회가 분열되면서부터 보수적인 교회는 전도와 선교에만 치중하는 교회가 되었다. 1950, 60년까지 구제봉사활동(Diakonia)은 계속 선교사들이 맡아 했으며, 한국 신자들은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외국 교회의 선교부나 봉사기관의 원조를 받아 했던 것이다.
선교사들의 관심과 기여는 다양하였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한국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기여한 것을 충분히 계승하여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는 일은 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문물을 유입하는 통로가 다양화되었기 때문에도 그러하며, 일제의 박해하에서 교회는 자기 생존을 위하여 안간힘을 써야 했을 뿐 아니라 참여할 사회조차도 상실한 상황에 처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와 교회의 설립을 위하여 교회가 직접 관여하지 않는 주변의 일까지, 본국 선교부에서 우려할 정도로 열심히 하였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현상들이 한국에 대한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으로 인하여 결과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고는 지양해야 한다. 선교사들은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으로 생각한 방법을 따랐을 뿐이다. 교육과 사상이 그렇듯이, 교회의 신앙은 한번 짜여진 틀에 계속 찍혀 나오는 공산품 같은 것이 아니다. 자립한 교회는 프로그램된 로보트가 아니다. 백년이면 몇 세대가 살고 가는 긴 세월이다. 그 세월의 역사적인 과정에서 얼마든지 많은 변수가 작용할 수 있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들포도를 맺었다는 탄식의 말씀이나 가라지 비유가 그것을 말한다.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현상의 원인은 초기 선교사들에게 있기보다는 주로 역사의 과정에 있었던 복합적인 사건들과 한국교회와 지체된 우리 각자에게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미개발 국가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곳에 와서 복음의 전도자이면서 동시에 문화의 전수자로 선교사들이 다양하게 일한 것을 해외로 향하는 오늘의 한국 선교사들이 그대로 모방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선교지의 시대적 상황이 다르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와 보냄을 받는 선교사들은 서로 존중하고 협력함으로써 복음을 전하며, 한국교회의 자립과 하나됨을 위하여 힘쓴 서양 선교사들의 자세와 방법을 귀감으로 삼아 나름대로 최선의 선교 방법과 정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 가격2,3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2.05.06
  • 저작시기2002.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398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