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성립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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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론

Ⅱ.고구려의 기원
1)건국과정
2)주변정세

Ⅲ.고구려의 건국
1)건국과정
2)세워진 연대
3)고구려의 5부문제

Ⅳ.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않다.
이상과 같은 용례들을 간단히 살펴본 바에 의하면 那, 奴자는 지명에 쓰는 글자들이며 그 어떤 지역을 가리킨 명사임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5부의 명칭에 那자와 奴자를 쓴 것으로 보아 그 5부를 5개의 혈연적 부족으로가 아니라 지역적 단위이며 정치적 세력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말할 근거를 가지게 된다.
高句麗에는 이미 紀元前 37년 이전에 적지 않은 소왕국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족 가운데서 가장 큰 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는 5개부가 고구려국가를 형성하였으며 왕권은 소노부의 정치세력이 쥐고 있었던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족의 소국들은 이미 고조선 시기 고조선의 진반국영역에서 형성되었고 그 가운데서 5부의 정치세력은 벌써 고조선 말기에 고구려를 형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조선이 망한 후 한나라 침략세력을 내몰아야 할 역사적 요구는 그 통합과정을 빠르게 촉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5부의 정치집단들은 각각 세력을 확장하여 왕권을 다투게 되었으며 그 결과 기원전 37년경에는 계루부 세력이 소노부의 왕권을 탈취하고 왕실을 유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몽의 건국설화는 계루부가 왕권을 탈취한 사실을 신비화하여 만든 것이며 주몽이 결코 고구려왕조의 건립자는 아니었다. 주몽이후 고구려 왕실에서는 주몽이전의 고구려 왕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고구려 건국전설을 꾸며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Ⅳ.結 論
지금까지 미약하게나마 高句麗의 起源과 建國 說話, 建國科程 그리고 5부의 문제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20세기에 日本이 아무리 中國을 능가할 힘을 발휘하고 있다하더라도 동아시아의 역사는 분명 중국중심의 역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아무리 고구려 문명이 뛰어났다고는 하지만 동아시아 역사의 중심은 역시 중국문명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체적인 시각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각 시대마다 중국문명이 동아시아의 중심에 있던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의 거의 대부분의 종족들은 황하유역의 농경지대를 차지하기 위하여 쟁탈을 벌였으며 그것은 原住民이라 할 수 있는 화하족-한족과 다른 여러 종족과의 싸움으로 나타났다. 특히 북방과 동북방지역의 종족들이 주로 한족을 이기고 이 지역을 차지한 사례가 많았다. 그런데 북위·요·금·원·청 등 숱한 이민족이 만리장성을 넘어 들어가 한족을 지배하며 한 시대를 호령했지만 결국 그들은 소리없이 사라졌다. 그것은 정착농경민의 문화에 유목민족들이 당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달랐다. 고구려는 동방에서 중원지역과 비교할만한 농경지대를 확보하고서 농경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고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지역으로 진출하지 않고서 동방지역에서 최고의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동방지역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의 문명을 형성함 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중원지역과 별개의 또 하나의 농경문명을 형성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중원지역과 별개의 문명을 형성하였던 동방지역의 문명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고구려 사람들이 자신들이 처한 조건에서 가장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삶의 방식을 찾았기 때문에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4세기 말부터 6세기 말까지 고대 신석기 시대로부터 존재했던 4대 동아시아문화권 지대에 4대강국의 하나로 고구려가 자리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대에 고구려는 안정적인 정치를 기반으로 가장 수준 높은 문명을 형성하고 발전시켰다.
하지만 남북조시대의 한족들은 과거 한나라 시대의 통일된 중국문명과 그 시대의 천하관 부흥을 꿈꾸었다. 결국 중국지역을 統一하면서 등장한 수나라는 과거 시대의 부흥을 바라는 한족의 열망을 담아 고구려와 文明戰爭을 일으켰다. 70년 이상의 전쟁 끝에 당 문명과 이를 도운 신라의 협공, 내부 분란 등의 이유로 高句麗는 滅亡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4세기부터 형성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종말이었다. 아울러 중국문명은 고구려 문명과 전쟁에서 현실적인 수모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체성, 자신들의 문화적 우위와 자존적인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역사책을 집중적으로 저술함으로써 중국문명은 역사서의 승리를 얻게 된다. 그것은 한나라 시대에 형성된 한족중심의 중국문명이 남북조시대의 위축에서 벗어나 새롭게 더 큰 세계문명으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반면 고구려 멸망으로 야기된 국제질서의 변호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다시는 동방문명이 문명적으로 中國文明에게 대항할 수 없는 열악한 상태로 빠지게 만들었다. 요동과 한반도북서부지역의 농업적 생산기반이 붕괴된 이후 동방에서 일어난 어떤 나라도 동방지역에서 독자적인 문명권을 형성하지 못함으로써 더 큰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지역으로 진출해야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것은 결국 자기 종족의 정체성마저 상실하게 했다. 오로지 고구려의 직계혈통을 지하는 한국인만이 韓半島에 남아서 자기 종족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했지만 고구려가 가졌던 문명권형성에는 실패하였다. 고려시대 윤관의 9성실패, 묘청의 난 실패, 위화도 회군 등으로 만주지역을 차지하여 동방의 독자문명권을 형성할 기회를 상실함으로써 중국문명의 위성문명으로 그 위상이 떨어지고 말았다.
高句麗의 滅亡은 결국 中國文明이 동아시아사에서 승리자가 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며 동방지역의 자생적 문명권의 실질적인 終焉이 된 셈이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중국문명의 독주를 가져와 동아시아의 競爭的 發展을 저해하게 된 원인이었다. 결국 고구려의 멸망은 韓國史의 불행인 동시에 동아시아의 역동적인 생명의 힘을 와해시키는 동아시아사의 불행이었다.
◇참 고 문 헌◇
-圖書-
서병국, 『高句麗帝國史』, 혜안출판사, 1997
노태돈, 『高句麗史 硏究』, 사계절, 1999
김용만, 『高句麗의 發見』, 바다출판사, 1999
이옥, 『高句麗民族形成과 社會』, 교보문고, 1984
이기동 외, 『韓國古代史論』, 한길사, 1988
이지린, 강숙자, 『高句麗 歷史』, 논장, 1988
-論文-
지병목, 「高句麗 成立科程에 대한 考察」
홍정우, 「高句麗 建國始祖 追慕王에 대한 一考」漢陽大 碩士 論文,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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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8.26
  • 저작시기20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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