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神學(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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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신화적 종교의 몰락
Ⅱ. 목적론과 다이몬의 소리
Ⅲ. 善의 이데아
Ⅳ. 운동과 영혼
Ⅴ. 神과 섭리

본문내용

갖는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전통적 종교의 신들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위의 사정은 그에게도 타당하다. 이렇게 본다면, 필자의 생각으로는 신에 관한 플라톤의 언급들과 관련해서, 그의 신은 인격적인가 아닌가, 하나인가 여럿인가, 초월적인가 내재적인가 하는 문제보다는 오히려 그는 어떤 것들을 신 또는 신적이라고 부르는지 그리고 그가 그렇게 부르는 많은 다양한 것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가 더 중요할 것이다.
3. 신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도 플라톤의 제시 양식의 다양함을 고려에 넣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대화편에서 그는 논의되는 내용과 표현 양식을 그가 등장시키는 인물들의 지식과 성향에 맞추고 있고, 많은 비유를 사용하며 신화적 이야기 방식을 채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거기에 표현된 것들이 글자 그대로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비유적인 표현인지를 우선 가늠해 보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김 교수도 시사하고 있듯이, <티마이오스>에서 데미우르고스에 관한 플라톤의 언명들을 우리가 얼마만큼이나 비유적인 것으로 볼 것인가가 늘 문제가 된다. 많은 대화편들에서 데미우르고스 또는 지성(nous)이 규칙적 운동의 원인으로서 제시되고 있는데, 논증적인 대목에서는 운동의 원인이 지성과 동일시되며, 반면 신화적 이야기의 방식을 취하는 부분에서는 지성은 나타나지 않고 대신 데미우르고스가 인격적 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4. 우리는 플라톤이 신들에 대한 믿음을 직접적인 주제로서 상세하게 다루는 흔하지 않은 경우를 <법률> 10권에서 만난다. 김 교수도 제시하고 있듯이 여기서 플라톤은 당시 식자들 사이에 퍼져 있던 신에 대한 견해, 즉 (1)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존재하지만 사람들에 대해 마음쓰지 않는다, (3) 마음쓰지만 기도나 제물로 신들의 마음을 쉽게 돌릴 수 있다는 생각을 반박한다. 이 견해의 반박이 <법률>의 문맥에서 중요했던 것은 그것이 정의와 법과 제도를 단지 정하기 나름인 것으로 간주함에 의해 그것들의 기초를 무너뜨린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두드러지게 신학적인 이 논의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플라톤이 저 무신론적 견해의 원천이 잘못된 자연학에 있다고 파악하고 신들이 존재한다는 그의 논증을 자신의 자연학을 토대로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것의 생성과 운동의 첫째 원리이며, 그가 이전 대화편들에서 간략히 언급하고 지나쳤던 논점이 이곳에서 충분히 전개된다. 첫째 원리의 지위에 놓일 수 있는 것으로서 자연, 우연, 기술(또는 지성)이 논의된다. 자연탐구로부터 무신론에 이른 사람들에 따르면 처음에 불, 물, 흙, 공기가 자연에 의해 [본래] 그리고 우연히 존재하며, 그것들 각각의 특성에 따른 그것들의 운동과 우연한 결합으로부터 땅과 천체들이, 그리고 식물과 동물들이 형성된다. 생명체의 산물인 기술은 순서에서 뒤의 것이며 기껏해야 자연의 모상들을 만들거나 모방할 뿐이다. 정치나 입법은 더욱 자연과 거리가 멀고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며, 신들과 종교는 자연에서 가장 먼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다. 플라톤의 반박의 요점은 이 순서를 역전시키는 것이다. 그는 영혼이 '그 자신이 자신을 움직일 수 있는 운동'(896a)임을 밝히고, 영혼 또는 지성을 제 1원리로 놓는 자연학만이 올바르다고 논증한다. 이렇게 <법률> 10권에서는 신학, 자연학, 실천학이 서로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서 함께 논의되며 거기서 중심의 위치에 있는 것은 자연학이다.
필자가 김 교수도 다루고 있는 <법률> 10권의 내용을 되풀이해서 제시하는 이유는 그가 이것을 좀더 상세히 다루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이 곳에서는 김 교수가 줄곧 세우려 했던 논점들, 즉 종교의 쇠퇴로 인한 상대주의, 노모스의 새로운 근거의 필요, '유물론적 기계론'에 맞선 목적론의 옹호 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 부분을 상세히 다루었더라면 김 교수는 자신의 논점들을 바로 플라톤의 텍스트에 입각해서 상세히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랬더라면 더 나아가 과연 오늘날에도 우리는 플라톤의 자연학과 신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아니면 그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한 무신론적 자연탐구자의 견해와 거의 동일한 오늘날의 과학의 입장을 맞다고 보아야 하는지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김 교수의 논문이 우리에게 제공했으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5. 이제 필자는 김 교수와 의견을 달리하는 것 몇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 김 교수는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온'(Daimonion)을 좀 지나치게 해석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다이몬의 소리에 의해 덕이 무엇인가를 직관할 수 있다," "새로운 정신적 기반은 … 다이몬의 소리에서 발견되었다" 또는 "다이몬의 소리에 근거한 아레테의 추구는 플라톤에 이르러 이데아론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목적적 운동의 근본 동인은 다이몬의 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변명>(31d 이하)에서 '다이모니온'은 소크라테스에게서 부정적인 역할만 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즉 그는 '그것이 [나에게] 나타날 때 그것은 내가 행하려고 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기는 하나, 하도록 촉구하는 일은 결코 없다'고 말한다.
둘째는 좋음의 형상에 대해서인데, 김 교수는 "선의 이데아는 용기와 절제 사이의 공통점을 설명할 수는 있으나 양자간의 차이를 말하기 어렵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것 또한 지나친 주장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국가> 6-7권에 제시되는 문답법적 탐구는 가정들로부터 가정되지 않은 원리에로 나아가며 가정들을 받침대로 딛고서 모든 것의 원리에로 올라가고, 이것을 파악한 다음 다시 이것에 의존하는 것들에 의존해서 결론에로 내려오는 탐구로 제시된다(511b-e). 플라톤은 이 과정을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하는데 이때 그것은, 문제가 되는 것을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구별해 정의하는 것, 모든 반론들을 헤치고 나아가면서 먼저 제시되었던 정의를 수정하고 폐기하고' 또 새로운 정의를 재구성하기를 계속하는 과정으로 설명된다(533c 이하). 이때 물론 '가정되지 않은 원리'는 좋음의 형상을 가리키며, 그것의 파악에 이르는 과정은 용기, 절제 등의 차이를 분명히 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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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2.09.22
  • 저작시기2002.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3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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